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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2014년 1월부터 격월로 발행되는 조선대학교 소식지에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하다"입니다. 지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유럽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삼고 2013년 여름과 2014년 1/2월에 다시 유럽을 방문하고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덧붙여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1월과 3월에는 도서관에 관한 얘기를 쓰려고 합니다. 첫 번째 글입니다.
조선대학교는 현수막 천국이다. 각종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에 더해, 투쟁의 구호를 담은 현수막이 일년 내내 캠퍼스를 뒤덮고 있다. 예쁘지도 않지만, 효과적이지도 않다. 너무 많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현수막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들도 불쌍하다. 사시사철 자신을 좌우로 잡아당기는 힘에 맞서 꼿꼿이 서 있어야 하니 말이다. 현수막 게시 전용 공간이라도 만들면 참 좋겠다. 그러나, 현수막 사용 방식과 관련해 무슨 소리를 해도, 별로 사정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행사 때마다 실내외에 다는 현수막 수가 줄어들 것 같지도 않고, 투쟁의 구호를 담은 현수막이 사라질 것 같지도 않고... 우선 정치외교학과부터 이런 현수막 공해를 줄일 방법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현수막 사용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
강사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다. 강의하는 내용과 장소에 따라 강사라는 말 앞에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에어로빅 강사, 요가 강사, 수영 강사가 있고, 문화센터 강사, 학원 강사, 대학 강사가 있다. ‘대학 강사’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어디까지나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을 일컫는 중립적인 표현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의미 분화 끝에 오늘날 다른 내포와 외연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전임 강사와 비전임 강사로 나뉘었고, 전임 강사가 ‘교수’가 되었고 비전임 강사가 ‘(시간)강사’가 되었으며, 오늘날 다시 교수는 ‘정규직 교수’, 시간강사는 ‘비정규직 교수’라고도 불린다. 배우는 학생의 관점에서는 모두 강의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강사이다. 환자의 눈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모두 의사인 것과 같다...
12.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제8권 1호,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2015년 봄, 73-97쪽. 11.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김경희, 에 대한 서평]", 제12집, 한국정치평론학회, 2013년, 211-217쪽. 10. "루소, 스피노자, 그리고 시민종교의 문제", 제19집 1호, 한국정치사상학회, 2013년, 109-142쪽. 9. "제국이라는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 제5집 2호, 2012년, 143-174쪽. 8.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은 누구인가", 제123호, 언론중재위원회, 2012년 여름, 47-56쪽. 7. "제국과 관용: 보편주의의 정치성에 대하여", 제43집,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2년, 527..
대학에서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대학 캠퍼스라고 하는 물리적 공간에서도 그렇고,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대학 사회에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한국 사회 일반의 현상이 대학에서도 나타나는 것뿐이다. 다만 대학 사회가 특별히 더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곳이 이른바 ‘지성의 전당’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대학을 규범적으로 ‘지성의 전당’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대학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학은 우리 사회의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아예 물리적 힘의 논리에도 휘둘리고 있다. 당위적으로는 지성이 힘이 장악해야 할 대학을 현실적으로는 경제력과 정치권력이, 그리고 때로는 물리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시..
제 지도교수인 헤어프리트 뮌클러 교수가 최근에 밝혀진 미국 정부의 전세계적 도감청 사실에 관한 칼럼을 하나 썼기에 한국어로 한번 옮겨봅니다. (출처: http://www.mdr.de/mdr-figaro/journal/kolumne292.html) 2010년에 이미 위키리크스와 관련해 비밀의 유익에 대해 칼럼을 쓴 바 있습니다. 이것도 시간이 나면 한국어로 옮겨보겠습니다. (http://www.spiegel.de/spiegel/print/d-75476953.html) Kolumne | MDR FIGARO | 28.06.2013 : Die Machiavellistische Seite der Demokratie von Herfried Münkler 칼럼/MDR 피가로/2013년 6월 28일/ 민주주의의 마키아..
교육의 결과를 성과주의로 평가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의 효과는 졸업 시점에서 취득하는 단위 수와 성적, 자격, 전문지식, 기능 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등교육에서 배운 좀 더 중요한 기법이라고 할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은 종합적으로 수치화하기가 불가능하다. 식견, 파단력, 감수성, 취미 등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익혔는지 물질화해 버리면 본인도 모른다. 하물며 학교에서 익힌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는 능력'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인 메타 능력meta competency이다. 말하자면 '척도를 만들어낼 능력'이다. '척도를 만들어내는 힘'은 기존의 '척도'로 계측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육의 결과는 수치로 평가할 수 없다. 이것은 당연하다. 이 교육의 결과를 수치화할..
무엇이 아님을 뜻하는 한자 ‘비(非)’가 그 앞에 붙은 단어들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그 속성이 아직 모호한데도, 이미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다. 권력은 그 ‘무엇’을 특권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비-무엇’을,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이미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 기피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무엇’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무엇’의 특권을 정당화한다. ‘무엇’을 추구하는 우리의 욕망은 권력의 효과이자 동시에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이 욕망의 정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저 ‘무엇’을 추구할 때, 우리는 ‘비-무엇’을 배제하여 ‘무엇’을 특권화하는 권력의 공범이 된다. ‘비-정규직’이라는 표현은 ‘정규직’을 특권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언론을 통해 지난 대선과정에서 이루어진 약속들이 지켜질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로 유명한 박근혜 대통령이니만큼 일단은 의심 없이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정말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일까? 당파적 공세를 위해, 또는 그저 선거에서 생색내기용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지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적 약속이 그렇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바꾸는 이유이다. 그 이유에 따라 국민의 신뢰가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신뢰가 사라지는 때는 말을 바꾸는 때가 아니라, 말을 바꾸는 이유가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임이 드러날 때..
결국 국민 전체에 의한 약속은 최후의 구성원 보존에 대해서도 그 밖의 모든 구성원 보존을 위한 것과 같은 배려를 제공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단 한 시민의 행복이라도 그것이 국가의 그것에 비하면 공통관심이 아니란 말인가? 한 사람의 개인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할 때 그것이 자기 나라의 번영을 위해 자원해 의무로서 죽어 자기를 희생한 훌륭하고 덕성 있는 애국자의 입에서 나오는 선언이라면 나는 경탄한다. 그러나 다수의 번영을 위해 정부가 한 무고한 자를 희생시킬 것이 허용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원칙이야말로 기왕의 폭정이 창안한 가장 가증스러운 것 중의 하나며. 내걸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위선적인 것이고 인정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며. 사회의 기본법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