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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근대 민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미국은 새로운 통치 체제를 도입했다. 그것은 왕정이 아니어서 공화정이라고 불렸지만, 아직 민주정이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민주정은 가난하고 무식한 대중의 ‘직접’ 참여를 가리키는 위험한 이름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새 정부에 그런 이름을 붙이기를 꺼렸다. 그러나 결국 이 새로운 체제는 민주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고대의 ‘직접’ 민주주의와 구별해 ‘대의’ 또는 ‘간접’ 민주주의라고 불렀다.현대의 대의 민주주의가 어쨌거나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복잡한 정치 과정의 시작이 ‘민(民)’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정..

“당원 동지 여러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당에 속해 있지 않던 사람이 선거 출마를 위해 정당에 가입한 뒤 마치 늘 정당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낯설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하다. 동지(同志)는 “목적이나 뜻이 같음,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목적이나 뜻이 전부터 같았다면 왜 전에는 당원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같아진 것이라면 그 목적이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일찍이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에 정의(正義)가 없으면 강도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익을 위해 뭉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수가 더 많고, 그래서 강해보일 수 있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그 성향 때문에 결국 서로 더 많이 가지려다가 분열될 수밖..

지난 8월 학생들과 함께 독일에 다녀왔다. 지역사회 공동체성 제고를 위한 선진 이민사회 방문조사였다. 함부르크 반츠벡 구의 초청을 받아 그곳을 먼저 방문했다. 독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베를린과 함부르크에는 그만큼 이주민 수도 많다. 베를린 주민의 약 36%가, 함부르크 주민의 약 37%가 이주배경을 가지고 있다. 구청장과의 대화 시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이주민 통합을 위해서는 선주민의 생각과 태도도 함께 변해야 하는데, 어린이는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통해, 한창 일할 나이의 성인은 직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통합에 필요한 지식과 태도를 배운다면, 은퇴자처럼 나이 든 사람을 교육하는 정책은 있나? 리첸호프 구청장은 이렇게 답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어떤 생각이나 태도를 시민에게 주입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리는 어디에서 비롯할까? 17세기 영국의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후배 존 로크는 자식을 잘 양육하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부모에게 순종할 자식의 의무도, 자식을 잘 길러야 할 부모의 의무도 모두 신(자연)의 뜻에서 찾았다. 이 신적 의무에서 권리도 생겨난다. 부모의 양육을 받을 자식의 권리나 자식의 복종을 받을 부모의 권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할 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로크는 이 권리나 의무가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를 근거로 이미 성인이 된 백성을 지배할 왕의 권리와 의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선배 토마스 홉스는 백성에 대한 주권자의 권리를 한편으로는 사람..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 그렇다. 여행을 하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행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부도 기본적으로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정치 역시 그렇다. 과거에 정치는 경제적 필요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정치는 통치를 의미했다. 타인을 물리적 힘으로 제압한 사람들이 보호를 대가로 경제적 생산물을 수취함으로써 스스로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정치(통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왕정이나 귀족정이 그렇게 운영되었다. 그러나 고대의 민주정도 사실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노예제 덕분에 각자의 가정에서 왕이 된 사람들이 모여 다만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던 것이다..

시평 쓰기가 너무 어렵다. 글쓰기 자체가 힘든 것도 있지만, 한국의 정치 상황이 너무 빨리 변해서 더 힘들다. ‘시평(時評)’인 만큼 시국에 맞춰 글을 써야 할 텐데, 생각이 좀 정리될 법하면 상황이 바뀌어서 애초의 소재가 이미 사람들 관심 밖에 있고, 새로운 관심사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 쓸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늘 이런 식이다. 부족한 내 지식과 순발력을 우선 탓해야 하겠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깊이 생각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 탓도 좀 하고 싶다. 지난 5주 동안 내 머릿속에 머물렀던 여러 주제 가운데 첫 번째는 추첨제였다. 광주 광산구의회의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의장 후보 선출에 합의하지 못해서 결국 ‘제비뽑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언..

이번 지방선거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선이 끝나고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 치러졌다. 온전한 지방자치가 아니기 때문에도 원래 중앙정치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치러지는 지방선거인데, 대선 직후에 치러진 지방선거여서 더욱 중앙정치의 강한 영향 속에서 치러졌다. (지방자치가 자체의 내부 논리에 따라 실시되기 위해서는 지역별로 다른 시기에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구조적 조건은 정권교체였다. 새로 출범한 중앙의 행정 권력에 줄을 대야만 지방이 한 푼이라도 예산을 더 따올 수 있고, 그래야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한 푼이라도 더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방의 주민들은 새로운 여당을 기본..

지난 5월 한 달 동안 많은 사람이 광주를 방문했다. 특히 보수 정치인들의 방문이 눈에 띄게 늘었다. 마침 5.18 기념식이 있기도 했지만, 그 전부터 이미 보수 정치인들이 부쩍 광주를 더 자주 찾고 있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5.18국립묘지에 와서 무릎을 꿇고 참배한 이후 이제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은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서나 선거가 끝난 후 5.18묘지를 맨 먼저 찾아오기까지 한다.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나 하던 낯선 행동이다. 이런 ‘호남 껴안기’ 행보 덕분인지 국민의힘 지지율이 이 지역에서 무려 두 배나 올랐다고 한다. 보수 정치인들의 이런 행보를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데 이들 보수 정치인의 광주 방문 전후의 행적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마치 좌우 균형이라도 맞추려는 듯이 대구를..
가능성이 막힌 사회, 판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 얼마 전에 나는 칠순을 넘기신 어르신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분은 요즘 사람들이 힘들다, 어렵다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전쟁도 겪고 보릿고개도 겪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말로 오늘날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어려워도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이 열심히 살았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열심히 해보려고도 하지 않고, 세상을 그저 비관적으로만 여기며, 때로는 마치 정말 위기가 닥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씀하셨다. 현상적으로는 그리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과거와 사뭇 다른 것 같다고 나는 말..
제 지도교수인 헤어프리트 뮌클러 교수가 최근에 밝혀진 미국 정부의 전세계적 도감청 사실에 관한 칼럼을 하나 썼기에 한국어로 한번 옮겨봅니다. (출처: http://www.mdr.de/mdr-figaro/journal/kolumne292.html) 2010년에 이미 위키리크스와 관련해 비밀의 유익에 대해 칼럼을 쓴 바 있습니다. 이것도 시간이 나면 한국어로 옮겨보겠습니다. (http://www.spiegel.de/spiegel/print/d-75476953.html) Kolumne | MDR FIGARO | 28.06.2013 : Die Machiavellistische Seite der Demokratie von Herfried Münkler 칼럼/MDR 피가로/2013년 6월 28일/ 민주주의의 마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