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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지난 8월 학생들과 함께 독일에 다녀왔다. 지역사회 공동체성 제고를 위한 선진 이민사회 방문조사였다. 함부르크 반츠벡 구의 초청을 받아 그곳을 먼저 방문했다. 독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베를린과 함부르크에는 그만큼 이주민 수도 많다. 베를린 주민의 약 36%가, 함부르크 주민의 약 37%가 이주배경을 가지고 있다. 구청장과의 대화 시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이주민 통합을 위해서는 선주민의 생각과 태도도 함께 변해야 하는데, 어린이는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통해, 한창 일할 나이의 성인은 직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통합에 필요한 지식과 태도를 배운다면, 은퇴자처럼 나이 든 사람을 교육하는 정책은 있나? 리첸호프 구청장은 이렇게 답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어떤 생각이나 태도를 시민에게 주입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다,..

요즘 나는 출근길에 땅을 쳐다보며 걷는다. 남이 흘린 동전이라도 주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똥을 밟지 않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출근길에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걷다가 한두 번 똥을 밟은 뒤로는 경각심이 생겨서 바닥만 보고 걷는다. 그런데 점점 상황이 나빠지는 것 같다. 뭔가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1999년 처음 베를린에 도착해 두 달간 서남쪽의 부유한 지역 기숙사에 임시로 살 때는 길거리에 그렇게 개똥이 많은지 몰랐다. 두 달 뒤 이주민이 많이 모여 사는, 집세가 저렴한 지역으로 이사하고 나서야 서양 언어에 ‘똥’이라는 뜻의 욕이 왜 있는지를 알게 됐다. 똥을 밟았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당황과 분노의 외침이 바로 “악, 똥!”이었다. 살면서 보니까 모든 지역에 고르게 개똥이 널려 있지..

2016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서베를린의 관광 명소인 일명 ‘깨진종탑교회’ 앞에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탈취된 트럭 한 대가 돌진한 것이다. 최소 12명이 죽고 48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사건이라고 하니 시민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크리스마스 마켓뿐만 아니라 연말 대목을 노리던 관광 산업도 함께 위축됐다. 불안 요소가 남아 있는 곳에 사람들이 방문을 꺼렸고 강해진 안전 조치가 사람들이 기대하던 연말 도심의 모습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라틴어 단어 테러(terror)는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또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테러는 폭력의 대상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 자..

어제 26일 독일에서는 총선이 치러졌다. 누가 새 총리가 될지도 관심사이지만, 수도 베를린에서 실시되는 주민투표의 가결 여부도 관심사이다. 베를린의 임대료 폭등 문제는 이미 국내 언론이 다룬 바 있지만, 대부분 보수 언론은 그러니까 우리도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결론을, 진보 언론은 그러니까 우리도 공공주택을 더 늘려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이 문제를 다뤘다. 사안을 다르게 한번 살펴보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통일이 된 후 한때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의 많은 시민들은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베를린을 떠났다. 안 그래도 낙후해 있던 동베를린은 사람들이 떠나서 더 낙후하게 됐다. 그 허름한 곳에서 기꺼이 살려는 사람은 가난한 대학생과 예술가, 외국인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기..

베를린은 확실히 매력적인 도시이다. 사람이 이렇게 북적거리는 것을 보면 나에게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정확한 수치상의 증거 없이도 몸으로 그런 변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나는 20년 전인 1999년 처음 베를린 땅에 도착해 7년 가까이 살다가 귀국한 후, 작년 여름 다시 베를린에 와서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사이의 변화를 한번 되짚어 보려고 한다. 서울과 베를린을 잇는 직항 노선이 여전히 없는데도 최근 들어 한국인들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연예인들도 이제 파리는 식상해서인지 베를린으로 화보와 뮤직비디오를 찍으러 많이들 온다. 유학(지망)생도 여전히 많다. 그래서인지 원래 많던 한인 교회의 수가 그 사이에 더 늘었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한국학 연구소 초청으로 그..
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한다(7) 아렌트와 ‘생각’하는 인간 팔자 좋게도 1년이 넘게 유럽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광주에 있습니다. 글을 쓸 때에만 잠시 마음으로 유럽에 가 있을 뿐입니다. 유럽에서 머물렀던 때를 떠올리며, 유럽과 광주를 교차시키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얘깃거리가 떨어져 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져서 걱정입니다. 조만간 다시 유럽에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어느 도시에 가면 좋을까요? 우리는 보통 ‘유럽’에 간다고 말합니다. 제한된 수의 나라와 도시를 방문하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아’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유럽의 국경 개념이 우리와 같지 않아서 이동이 편하고, 또 도시의 역사가 국가의 역..
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한다(4) 도시의 여름, 물이 있는 도시 유럽 선진국의 시민들이 1년에 한 달 여의 휴가를 즐긴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휴가만 긴 것이 아니라 평소의 노동 시간 자체도 짧습니다. 한 달 휴가를 즐기는 대가로서 나머지 열한 달 동안 과로를 해야 한다면 긴 휴가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유럽인들이 긴 휴가를 즐기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심지어 도시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때 비어 있는 도시를 채우는 사람은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멀리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시민들입니다. 베를린 유학 시절의 일입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저는 어느 치과 병원 청소 일을 하고..
그 도서관은 아직 거기 있을까 연재를 시작할까 합니다. 가물가물해진 기억의 끈을 조심스레 붙잡고 유럽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결국 광주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저를 통해 광주가 유럽을 만났고, 또 유럽이 광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도서관을 좋아합니다. 도서관장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할 정도입니다. 도서관의 맛을 알게 된 것은 사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였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일명 ‘독서실’과 도서관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도서관 이용과 관련한 교양과목을 수강하면서 처음으로 개가식 도서관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에는 온갖 책이 학문분야별로, 그리고 주제별로 나뉘어 꽂혀 있었습니다. 목사인 아버지의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