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려워
[사설] 강사법 시행에 신중해야 한다 본문
강사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다. 강의하는 내용과 장소에 따라 강사라는 말 앞에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에어로빅 강사, 요가 강사, 수영 강사가 있고, 문화센터 강사, 학원 강사, 대학 강사가 있다. ‘대학 강사’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어디까지나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을 일컫는 중립적인 표현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의미 분화 끝에 오늘날 다른 내포와 외연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전임 강사와 비전임 강사로 나뉘었고, 전임 강사가 ‘교수’가 되었고 비전임 강사가 ‘(시간)강사’가 되었으며, 오늘날 다시 교수는 ‘정규직 교수’, 시간강사는 ‘비정규직 교수’라고도 불린다.
배우는 학생의 관점에서는 모두 강의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강사이다. 환자의 눈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모두 의사인 것과 같다. 그러나 가르치는 의사와 배우는 의사의 구별이 있듯이 가르치는 강사와 배우는 강사의 구별도 있다. 모두 날 때부터 강사일 수 없으므로 강의하는 것도 우선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해방 후 대학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 규모가 계속 커질 때 아직 수련을 마치지 않은 강사도 전임이 되었고, 비전임이 전임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았다. 양적팽창기가 끝나고 대학간 생존경쟁이 시작되면서 훈련을 거쳐 전임 강사가 되는 과정도 함께 경쟁적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신분적 뉘앙스를 지닌 ‘교수-강사’ 구분이 생겨났다. 한 대학에서 전임이 되기 위한 훈련 과정을 거치던 과거의 비전임 강사는 이제 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며 강의하는 시간강사가 되었다.
시간강사가 서울과 지방에서 똑같지는 않다. 강의수요가 많고 강의 외의 활동기회도 많으며 교수가 되는 과정이 비록 경쟁적이지만 아직 그 가능성이 열려 있는 서울에서는 시간강사가 ‘아직 교수가 아닌 사람’일 수 있다. 시간강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시간강사의 자기 인식도 비교적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강의 수요는 많고 강의 외의 활동 기회가 별로 없으며 교수가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지방에서 시간강사는 그저 ‘교수가 아닌 사람’이다. 신분상승이 개별적으로 가능할 때 사람들은 신분의 구별을 인정하지만, 개별적 상승이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구별을 부정한다. 교수나 강사나 다 똑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인데 대학과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분업의 원칙을 따라 그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차별적으로 관리한다는 주장은 대학 사회 내의 유동성이 현저히 낮은 지방에서 더 힘을 얻는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신분의 안정(정규직화)과 경제적 안정(급여인상)을 요구하게 된다.
한국 대학에서 ‘강사’의 의미가 시간적으로 어떻게 변해왔고 공간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매우 단순하게 요약했다. 그러나 강사의 의미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고, 대학에 따라, 학과에 따라 다르다. 일률적으로 이해하여 단일 규정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 각 대학과 각 학과는 오랜 시간 동안 각자의 사정에 맞게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전임-비전임 강사들의 구성을 바꾸며 자기를 유지해 왔다. 이 역사와 관습을 무시하고 전국 대학에 일률적으로 ‘비정규직법’이나 ‘강사법’을 제정하여 강제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처사이다. 올해 초 시행이 예정되었다가 한 해 유예된 강사법의 시행을 또 다시 유예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 이 글은 2013년 11월 25일자 <조대신문> 사설로 실린 것입니다.
참고글 "[사설] 비정규직은 비정규적이어서 슬픈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