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논문 에세이 번역 책 (114)
정치는 어려워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흔히 뱀은 인간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여겨지곤 한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을 결과로 놓고 그 원인을 간교한 뱀의 유혹에서 찾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징적 사건을 기록해 놓은 「창세기」를 스피노자와 함께 잘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창세기」 2장은 “사람과 그 아내가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어지는 3장에는 사람(아담)과 그 아내(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고 눈이 열려서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에 하느님이 사람을 찾았을 때,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을 동산에서 내쫓으며 하느님은..

“신호등이 꺼졌다.” 최근 며칠간 독일 관련 뉴스에 등장한 표현이다. ‘신호등 연정’은 독일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사회민주당, 녹색당, 자유민주당의 상징 색이 각각 빨강, 초록, 노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 사회민주당 소속의 숄츠 총리가 연립정부의 한 축을 구성하던 자유민주당 소속의 린트너 재무장관을 해임했다. 그가 연립정부 구성 당시의 합의에 어긋나게 행동한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이로써 연립정부가 무너졌다.숄츠 총리는 애초에 내년 예산안 처리를 마치고 성탄절 연휴를 보내고 나서 내년 초에나 자신에 대한 의회의 신임 여부를 물을 계획이었다. 그때에도 의회의 다수가 자신을 여전히 지지하면, 비록 ‘신호등 연정’은 깨졌지만, 자신이 정부를 계속 운영해 갈 생각이었고, 만약 의회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

지난달 15일부터 24일까지 광주와 함부르크의 청년들이 교류하는 행사가 치러졌다. 2년 전 처음 시작된 두 도시의 청년 교류가 독일 청년들의 이번 광주 방문을 통해 3년째 이어지게 됐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지게 될지 모르는 이 교류의 시작은 이렇다. 2022년 4월쯤이었다. 한때 우리 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친 적이 있는 함부르크 출신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안톤 숄츠 씨가 나에게 전화를 해 함부르크의 청년들이 교류 파트너를 찾고 있는데 혹시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맡겠노라고 대답했고, 그해 9월 처음 함부르크에서 청년 16명이 광주를 방문해 우리 대학 학생들과 10일간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이 교류는 함부르크의 어느 청소년의 집에서 시작됐다. 그곳에서 함께..

내가 마지막으로 헌혈을 한 것은 1998년이다. 한때는 나도 기꺼이 헌혈에 동참하는, 피 뽑는 것 정도는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한 청년이었다. 문제는 1999년 독일로 유학간 뒤에 생겼다. 영국발 광우병 사태가 유럽 전체를 휩쓸던 2000년, 유럽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유통되던 쇠고기를 전량 수거해 폐기해야 하느냐 마느냐 논쟁이 일었다. 쇠고기 소비가 급감하고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염려가 급증했다. 외국인 유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건강을 염려했다.어느날 선배와 저녁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 안주로 소시지를 시키자 선배가 먹지 않았다. 쇠고기가 섞여 있을지 모르는 소시지조차 먹기 불안했던 것이다. 당분간 쇠고기는 물론이고 육류 자체를 되도록 먹지 않으려던 선배에게 농담으로 말했다. “이 소시지 먹으..
https://kugnews.tistory.com/621 정치 테러의 가면을 쓴 병든 사회의 민낯정치 테러의 가면을 쓴 병든 사회의 민낯 지난 1월 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부산 방문 일정을 소화하던 중 60대 남성에게 흉기로 습격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kugnews.tistory.com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근대 민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미국은 새로운 통치 체제를 도입했다. 그것은 왕정이 아니어서 공화정이라고 불렸지만, 아직 민주정이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민주정은 가난하고 무식한 대중의 ‘직접’ 참여를 가리키는 위험한 이름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새 정부에 그런 이름을 붙이기를 꺼렸다. 그러나 결국 이 새로운 체제는 민주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고대의 ‘직접’ 민주주의와 구별해 ‘대의’ 또는 ‘간접’ 민주주의라고 불렀다.현대의 대의 민주주의가 어쨌거나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복잡한 정치 과정의 시작이 ‘민(民)’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정..

이번 총선에서 가장 큰 사건은 조국혁신당의 깜짝 등장과 의외의 성공이다. 여당의 참패와 야당의 압승도 조국혁신당의 돌풍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조국혁신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 24.25%의 표를 얻어 제22대 국회에서 12석을 차지하게 됐다. 단독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지만, 애초에 법안을 단독 발의할 수 있는 10석을 목표로 시작한 정당으로서는 만족할 만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대표의 운명과 결부된 이 당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조국혁신당에 한 가지 기대를 품게 됐다. 지난 2월 13일 조국 대표는 자신의 고향 부산에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선언 장소는 1979년 부마항쟁을 기념하는 민주공원이었다. 다음날 조 대표는 광..

작년에 우리는 두 개의 커다란 선거를 치렀다. 그런데 내년에 또 전국 단위의 선거를 치른다. 사람들의 정치적 관심이 온통 선거에 맞춰져 있다. 누구 말마따나 선거가 너무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 같다. 정치의 수단에 불과한 선거가 정치 자체를 잡아먹고 있는 양상이다. 민주적 정치의 중요 수단인 정당이 선거를 위한 조직이 되었고 선거전문가 집단이 되었다. 선거에 맞춰 조직을 쇄신하고 인물을 영입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벌써 내년 총선을 위해 양당 모두 비대위 체제로 전환해야 하는 것 아니냐, 싹 다 물갈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온다. 이제는 각 정당의 지지자들조차 그런 시각에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각종 노래경연대회가 음악의 창작과 공연을 압도하고 있듯이, 선거라는 경연대회가 정치를 ..

“당원 동지 여러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당에 속해 있지 않던 사람이 선거 출마를 위해 정당에 가입한 뒤 마치 늘 정당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낯설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하다. 동지(同志)는 “목적이나 뜻이 같음,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목적이나 뜻이 전부터 같았다면 왜 전에는 당원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같아진 것이라면 그 목적이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일찍이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에 정의(正義)가 없으면 강도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익을 위해 뭉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수가 더 많고, 그래서 강해보일 수 있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그 성향 때문에 결국 서로 더 많이 가지려다가 분열될 수밖..

2024년은 김대중 전 대통령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청년 사업가 김대중은 1971년 40대의 나이에 야당 대통령 후보로서 박정희와 맞붙었다.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도전한 끝에 그는 결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평생에 걸친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호남이 배출한 20세기 최고의 정치인이기에 그에 대한 호남민의 자부심도 크고 그의 뒤를 이을 정치인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그러나 해마다 그의 기일이 되면 그런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탄신 100주년인 올해에도 어김없이 그랬다. 총선을 앞두고 많은 정치인이 스스로 그런 ‘큰 인물’이 되겠다고 외치지만, 그럴수록 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