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려워
[에세이] 누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가 본문
1. 프라이버시와 평등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조차 안다”는 말이 있다. 이웃과 얼마나 친한지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옛날 농경사회에 나와 너의 구분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신혼 첫날밤, 신랑과 신부가 있는 방 문의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엿보는 풍경 또한 과거의 너-나 없었음의 표현이다. 옛날 유럽의 왕실에서는 왕과 왕비가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합방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과거에 마치 프라이버시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사실 ‘프라이버시’는 늘 있었다. 오늘날 프라이버시로 생각하는 것을 옛날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지, 프라이버시는 언제나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침해되지 않아야 할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과거에도 프라이버시는 침해되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천한’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존중되지 않았다. 동일한 인격의 소유자로 간주되지 않은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이런 생각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신의 자녀로서 평등하다.” ‘(신 앞에서) 평등한 개인’이라는 관념으로부터 ‘각자의 구원은 각자가 책임진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종교적 믿음의 옳고 그름을 남이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변형, 즉 청교도적 변형이 생겨났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신 앞에서 깨끗하고 떳떳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감출 것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제 프라이버시의 주장은 ‘떳떳하지 못함’의 증거가 되었고, 그러므로 오히려 (교회당국에 의한) 프라이버시 침해의 정당한 사유가 되었다.
신분제 사회에서의 프라이버시 침해와 전체주의적 평등 사회에서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모두 개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자가 높은 신분에 속한 사람과 낮은 신분에 속한 사람, 혹은 전혀 신분이 없는 사람 간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발생한다면, (사실상 전자의 ‘민주적’ 변형인) 후자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나 질적으로 규정된 ‘평등’의 의미에 의하여,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더 평등한’ 사람과 ‘덜 평등한’ 사람이 나누어지면서 발생한다.
현대의 다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 사회는 원칙적으로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개인의 권리를 그 어떤 양적이고 질적인 기준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개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에 근거한 프라이버시 침해가 일어나고 있다.
2. 기술의 발전과 민주적 통제
근대 국가는 군사적ㆍ비군사적 기술의 혁명적 발전과 함께 등장했다. 군사적 기술의 발전은 전쟁을 매우 돈이 많이 드는 일로 만들었고, 고가의 무기와 숙련된 병사를 확보할 수 있는 대규모의 영토 국가만을 유일한 전쟁의 행위자로 만들었다. 또한 활자 매체의 발달은 정보의 기록과 보관, 전달을 용이하게 하여 넓은 영토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었다. 국가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국토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고 기록했다. 기술의 발전은 근대 국가의 토대였다. 그리고 오늘날 발전한 기술은 국민 개개인의 생체 정보까지 수집한다.
기술의 발전은 동시에 이전 단계의 기술을 값싸게 만든다. 과거에는 컴퓨터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물건이어서 그것을 개인이 쉽게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그것보다 성능이 훨씬 더 좋은 컴퓨터를 개인이 어렵지 않게 소유할 수 있다. 무기 기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전쟁의 국가 독점이 약해지고 있고, 국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법적 권한이 아니라) 능력도 탈국가독점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정보 프라이버시의 침해 가능성 역시 탈국가독점화하고 있다. 오늘날 개인의 정보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는, 개인의 정보를 국가행위자뿐만 아니라 비국가행위자도, 자국정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외국정부도 수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행위자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전쟁의 국가 독점은 동시에 전쟁의 민주적 통제를 가져왔다. 무기 기술의 발전은 무기를 한 편으로는 비싼 것으로 만들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공적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대량의 인명 피해를 낳는 무기를, 개인이 사적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되겠지만,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집단이 사적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되겠기 때문이다.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은 기술의 발전이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고 그 사용의 권한이 국가의 수중에 놓이면서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정보 수집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수집의 대상이 되는 개인 정보의 범위와 수집 방법, 그것의 활용 목적과 방식, 공개되는 정보의 범위와 열람 권한의 범위, 그리고 그 정보의 보관 기간 등을 정보 수집 대상이 되는 개인들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결정함을 의미한다. 이런 민주적 통제를 통해 개인은, 비록 자신의 정보가 국가에 의해 수집되지만, 여전히 익명으로 남을 수 있고, 즉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수 있고, 그런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국가의 권력은 투명하게 사용됨으로써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을 수 있다[사생활의 익명화와 권력의 투명화]. 그러나 이런 민주적 통제가 국가 운영의 그저 기술적인 부분의 하나로 이해되기 시작하면,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국가는 이른바 ‘민주적’ 통제 메커니즘을 내장한 기계와 같은 것이 된다. 국가는 점점 익명화하고, 오히려 개인의 사생활은 투명해진다[권력의 익명화와 사생활의 투명화].
오늘날 정보 수집 기술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국가 권력의 익명화에 안심하면서 국민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정보를 국가에 제공함으로써 사생활을 투명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사생활을 침해할 수도 있는 국가 권력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점차 잊으며, 그 결과, 외국 정부는 물론이고 다양한 사적 행위자들마저 개인 정보의 수집과 기록에 나서는 상황에서 그것을 통제할 정치적 힘도 잃고 있다는 것이다.
3. 개인주의 없는 프라이버시 보호의 한계
오늘날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권력은 국가의 이름으로만 행사되지 않는다. 합법적 형태로 국가와 유관하게, 그리고 불법적 형태로 국가와 무관하게 이 권력은 도처에서 시도 때도 없이 행사된다. 이 권력의 행사에 반강제로, 또는 자발적으로 우리는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의 동의와 무관하게 이 권력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행사되기도 한다.
이 권력은 도처에 있다. 다른 권력들과 쉽게 접속하면서, 익명으로, 단지 기술적으로만 존재하면서 도처에 있다.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이 권력은 그래서 쉽게 감시 권력으로 변한다. (예컨대, 개인용 휴대전화 사용내역과 신용카드, 교통카드의 사용 내역의 조회를 통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권력, (인터넷 공간의 감시와 개인용 컴퓨터의 해킹을 통해) 심지어 개인의 생각마저 감시하는 권력으로 변한다.
우리는 자신의 컴퓨터 바탕화면을 자신의 취향대로 설정한다. 이는 컴퓨터 속의 공간을 ‘사적인’ 공간으로 인식함을 의미한다[공간의 프라이버시]. 우리는 자신의 컴퓨터에 자신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기록하고 저장해둔다. 때로는 여러 폴더들 속에 잘 보이지 않게 숨겨두기도 하고, 비밀번호로 묶어두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방비 상태로 두기도 한다. 꽁꽁 감추어두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해서, 그 정보들이 사적인 것이 아닌 것은 아니다. 스스로 공개하기 전까지 그 정보들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것이다[정보의 프라이버시]. 그리고 이런 사적인 정보들이 타인에 의해 고의로 혹은 실수로 공개되었을 때, 우리의 프라이버시는 침해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해 항의할 때, 가해자나 제3자가 강제로 공개된 개인 정보의 내용을 따져 프라이버시 침해의 당부당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정보에 대한 결정권마저 빼앗기에 된다[결정의 프라이버시].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국가행위자와 비국가행위자에 의한 침해가 일어났을 때, 당사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공개된 사생활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그와 대비되는, 부당한 사생활 침해에 대한 과도한) 무관심이다. 때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를 오히려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 사생활 침해에 대한 항의를 무력화한다. 프라이버시의 침해 문제를 개인의 ‘보편적인’ 권리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래서 ‘공통의’ 이익의 침해로 보지 못하고, 그저 ‘특수한’ 개인의 이익 감소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쉽게 그 개인의 ‘특수한’ 사정으로 환원해버린다. 예컨대, 사생활이 문란하다거나, 사상이 불온하다거나, 신앙심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침해되어도 좋은 프라이버시’가 있다는 생각이다.
청소년의 인권이나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일종의 ‘침해되어도 좋은 프라이버시’라는 관념이 섞여 있다. 그들이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나빠서는 아니지만, 아직 또는 영구히 부족하기 때문에) ‘덜 평등’하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의 인권이나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한 생각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관념이 숨어 있다. 그들 역시 우리보다 (이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덜 평등’하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동등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프라이버시가 제대로 보호될 수 없고,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가 제대로 감시되고 통제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개개인을 동등한 법적 권리의 보유자로 인정하는 개인주의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기구나 비정부기구에 의한) 프라이버시의 보호나 (정보)인권의 보호는 큰 실효성을 가지기 어렵다. 사안 사안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거나 ‘저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홍보와 계도를 통해서는 결코 개인의 인권과 프라이버시가 존중될 수 없다. 타인을 나와 동일한 권리와 인격, 감정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지 못할 때, 타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가 곧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타인의 (침해되어도 좋은) 권리에 대한 침해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도 있게 된다.
(정보)인권은 기본적으로 자유의 문제이다. 사적인 자유와 관련해 우리는 결코 ‘보호되어 마땅한 자유’와 ‘침해되어도 좋은 자유’를 구분할 수 없고, 구분해서도 안 된다. 개인의 사적 자율성은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이다. 거기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사회의 전체화는 시작되고, 결국에는 (억압하는 자의 자유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자유가 억압된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나치가 사민주의자들을 감금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내가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나치가 노동조합원들을 체포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내가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나치가 나를 체포했을 때, 나를 위해 싸워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날 정보 기술의 발달로 인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권력은 점점 투명해지고, 비가시화하고, 익명화한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성숙, 즉 개개인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성장하지 않으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쉽게 침해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권력의 부당한 개입에 우리는 제대로 맞설 수 없을 것이며, 결국 그 권력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 이 글은 2011년 12월 19일(월) 오후 2시~6시에 광주은행 본점 3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주최 지역순회 정보인권 교육 및 토론회에 토론자로서 참석하여 발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