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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민합창단의 등장을 기대하며

공진성 2012. 2. 11. 17:01

독일 유학중의 일이다. 장시간 논문작성을 위해 앉아 있다 보니 건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척추 주변의 신경이 눌렸는지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며 차라도 마시면서 ‘신경’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 결국 모든 게 신경성이란 말인가. 주의를 가끔씩이라도 분산시킬 활동이 필요했다. 유학 초기엔 그래도 이래저래 할 일들이 많았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도 많았고 수업에도 들어가야 했으며 돈도 벌어야 했으니, 머리도 바빴지만 몸도 무척이나 바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학위논문 작성을 시작하면서 인간관계도 단순해졌고,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으니, 움직일 일도 점차 없어졌다. 그저 책상 앞에만 앉아 있게 되었다.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교회 성가대 활동을 꾸준히 했었고, 금요일마다 한국어를 가르친 학교에서도 세 시간 중 한 시간은 한동안 학생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었다. 그러나 교사 일을 그만두고 한인교회에도 나가지 않게 되자 노래할 일도 없어졌다. 괜찮은 합창단이 없을까 두리번거렸다. 각종 공연 포스터와 전단, 인터넷 홈페이지를 들여다봤다. 다 괜찮은 합창단들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요소가 무엇인지 처음엔 잘 몰랐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합창단을 알게 되었다. ‘베를리너 콘체르트 코어’(Berliner Konzert Chor)라는 합창단이었다. 당시에 이미 창단 50주년을 맞은 나름 전통 있는 시민합창단이었다. 그곳에서 독일에서의 마지막 1년 반의 시간을 함께 노래하며 보냈다. 그리고 건강하게 학위과정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걱정이 앞섰다. 한국에서도 과연 계속 합창을 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두 번씩 평일 저녁에 합창 연습을 하고 수시로 공연을 하는 생활을 병행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보다, 과연 마음에 드는 합창단이 있기는 할까 하는 걱정이 더 앞섰다. 독일에서의 경험이 그만큼 좋았기 때문이었다. 세 가지 검색 조건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서울에 있는 합창단들을 조사했다. 혼성일 것, 종교색을 띠지 않을 것, 프로는 아니지만 아마추어적이지는 않을 것. 검색 결과는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합창단은 ‘어머니’ 합창단이거나 ‘아버지’ 합창단이었고, 또 대부분 뚜렷한 종교적 지향을 드러냈다. 그나마 있는 비종교적인 혼성 합창단들은 취미모임 수준을 넘지 못해 보였다. 그러다가 또 우연찮게 한 합창단을 알게 되었다. ‘음악이있는마을’이라는 합창단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5년간 활동을 했다. 그리고 2010년 8월에 마지막 공연을 하고, 직장이 있는 광주로 내려왔다.


임용이 결정되기도 전에 걱정은 이미 시작됐다. 광주에서도 합창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시간이나 남들의 시선이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내가 원하는 합창단이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원한 것은 남성 합창단도, 종교 합창단도 아니었다. 바로 ‘시민’ 합창단이었다. 그때 작년에 본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광주민중항쟁 3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시향이 5백 18명의 ‘시민합창단’과 함께 말러의 제2번 교향곡을 연주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래! 예향 광주에는 시민합창단이 있겠구나! 그런 문화적 토양이 있으니 이런 기획도 할 수 있는 거겠지.’ 내 마음은 한껏 꿈에 부풀었다. 합창단에서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광주 시민들을 만나 함께 노래하게 될 꿈에…….

내가 베를린과 서울에서 몸담고 활동했던 합창단은 시민합창단이었다. 물론 시정부가 이 합창단의 활동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합창단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단원들이었다. 정부도 합창단의 이런 시민적 성격을 존중했고, 그 성격의 유지를 지원했다. 서울에서 합창단 활동을 할 때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굴지의 기업이 그 기업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조건으로 재정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우리는 고민 끝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어서 기업의 후원이 절실하긴 했지만 ‘기업’ 합창단이 아닌, ‘시민’ 합창단으로 남기로 했다. 재정적 안정을 얻는 대가로 자율성을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했다. 연습과 공연뿐만 아니라, 기획부터 연주할 곡의 위촉, 대관, 협연자 섭외, 홍보, 티켓 판매와 정산까지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시민합창단에는 그 일을 대신해줄 정부의 공무원도 기업의 직원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일에 필요한 재원도 스스로 마련했다. 시민합창단은,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부나 교회, 기업에 속한 합창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성가곡도 불렀고 찬불가도 불렀다. 경건한 종교곡도 불렀고 세속적인 사랑노래도 불렀다. 시민합창단에는 어떤 종교적 지향도 없지만 반종교적 지향도 없기 때문이다. 합창단에서 나는 다양한 지역 출신의 상이한 직업과 학력을 가진 평등한 남녀 시민들 가운데 그저 한 명이었다. 대학합창단이나 교회성가대와 다르게 시민합창단에는 그 어떤 공통의 위계도 없기 때문이다. 단원들은 모두 각자가 가진 상이한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합창단의 운영에 참여했고, 합창을 좋아한다는 단 한 가지 공통점만으로 나머지 모든 차이를 잊고서 하나가 되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종교적 성향과 무관하게, 그리고 나이나 학력과 상관없이 남녀 시민들이 이렇게 한데 모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스스로 그 모임의 주인이 되어 활동하기란 더욱 쉽지 않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합창이다.

합창은 건강한 시민을 만든다. 실제로 호흡을 제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지지만, 시민으로서도 건강해진다. 합창을 하면서 시민들은 (자기 부정이 아닌) 자기 완성을 통해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운다. 합창을 통해 시민들은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다양한 직업과 이념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차이를 넘어 협력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합창단을 직접 운영하면서 시민들은 작은 공간에서나마, 국가라는 추상적 권력기관에 대해서는 좀처럼 가지기 어려운, 참여의 효능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합창은, 그것이 국가기구나 종교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지 않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질 때, 민주주의를 위한 최고의 훈련 수단이 될 수 있다. 선진국의 많은 도시들이 시민들의 자율적인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이유가 단지 예술을 사랑해서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아니, 정치적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시민들의 자율적인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체육 활동도 지원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광산구에서 새롭게 지휘자를 뽑고 합창단을 구성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산구민이 아닌 나에게는 어차피 다 그림의 떡이지만, 특히 반가웠던 소식은 기존의 구립합창단들과 다르게 광산구가 혼성으로 합창단을 만들려고 하며, 이를 위해 연습 시간을 평일 저녁으로 정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구립이라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시민’ 합창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주부 중심의 합창단 구성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려고 한 점에서 ‘시민’ 합창단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오늘날 시민들의 자율적인 모임과 활동을 막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바로 경제적 효율성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시장 논리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체의 활동을 무익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가 팽배해 있어서 일견 무익해 보이는 모임과 활동에 시민들은 점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아무쪼록 광산구의 실험이 성공해서 다른 구립합창단들도 점차 시민성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나도 그 어느 합창단에서 다시 동료 시민들과 함께 노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이 글은 조선대학교 소식지 2011년 4월호에 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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