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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스피노자가 네덜란드로 간 까닭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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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스피노자가 네덜란드로 간 까닭은?

공진성 2012. 2. 11. 12:05

사상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관용에 대한 생각들

1. 내가 네덜란드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결코 히딩크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2002년 가을, (이곳 독일에서) 이웃나라인 네덜란드에 여행을 간다고 얘기했을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매번 들은 얘기가 “너, 히딩크 고향에 가니?”라는 질문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한참동안은 “히딩크 고향은 가봤니?” “기왕에 간 거 히딩크 고향에도 좀 다녀오지 그랬니” 하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하필 시기가 월드컵의 감동이 채 사라지지 않은, 그래서 히딩크라는 사람의 이름이 아직 우리 머리 속을 맴돌던 때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네덜란드와 히딩크를 연결시키는 것이 단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 것 같지만은 않다. 얼마 전에 한국어 수업 시간에(나는 베를린 세종학교의 한국어 교사이다) ‘~(으)로 유명하다’ 라는 문형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네덜란드는 무엇으로 유명해요?”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 때의 대답 중에도 치즈, 풍차, 나막신, 튤립과 함께 히딩크의 이름이 들어갈 정도이니, 이제 네덜란드와 히딩크는 우리 한국인의 머리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듯 하다. 하지만 내가 네덜란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스피노자라는 철학자 때문이다.


2. 스피노자의 고향은 암스테르담이다. 암스테르담은 지금도 네덜란드의 수도이며 상업의 중심지이지만, 네덜란드가 황금시기를 맞이했던 17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그 곳에서 나의 스피노자가 태어났다. 우리에게 조금 더 친숙한 영국의 존 로크와 1632년생 동갑내기이다. 고향은 암스테르담이지만, 우리 식으로 말해서 본적은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 어디쯤이다. 스피노자의 아버지가 16세기 말엽에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집요하게 행해진 카톨릭의 강제 개종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해 온 유태인 1.5세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태어난 다음 해, 그러니까 1633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진리라고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종교재판이 행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카톨릭에 의한 당시의 종교적 박해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네덜란드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유태인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유태인에게 뿐만 아니라, 영국의 청교도들과 프랑스의 위그노들에게도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왜 네덜란드는 이 종교적 피난민들에게 관대했던 것일까?

3. 우리에게 네덜란드는 ‘자유와 관용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마약과 매춘이 합법화되어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동성간의 결혼과 동성부부의 자녀입양, 그리고 심지어는 안락사마저 법적으로 인정하려는 추세여서, 명실공히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가장 관용적인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이 개방적 전통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16, 17세기이래 계속되어 온 ‘관용에 관한 논쟁’의 결과로 생겨난 전통인 것이다. 당시의 주된 관심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관용이었다. 17세기 당시 유럽에서 가장 관용적인 나라로 일컬어졌던 네덜란드도 사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그다지 관용적이지는 않았다. 구교도들의 종교적 자유가 인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교도들 가운데서도 칼뱅주의가 아닌 거의 모든 종파들이 끊임없이 의심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초의 독일의 유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는 책에서 16세기에 칼뱅주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종교적 박해와 불관용이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일독을 권한다). 물론 네덜란드의 상황이 칼뱅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있던 제네바와 같이 혹독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과 같이 종교적 자유가 넉넉하게 보장되어 있었던 것 또한 결코 아니다. 그러니 무신론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인 사상이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납되는 것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폭력에대항한양심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슈테판 츠바이크 (자작나무,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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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나저나, 무신론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인 생각도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일까? 오늘날에야 무신론이라는 것이 하나도 거리낄 것 없는 하나의 입장, 때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 합리적인 태도인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하니까,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살던 17세기 유럽에서 무신론자는, 그리고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공의 적으로 몰리던 판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의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종교를 가질 자유나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오히려 개인의 소극적 자유, 즉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개인의 고유한 자유로 인식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특정 종교에 반대하는 것조차 이 자유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5. 17세기에 이미 스피노자는 매우 근본적인 입장에서 종교의 자유는 물론, 사상 일반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스피노자는 ‘개인’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개인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도 없는 고유의 권리, 즉 ‘자연권’을 내세웠다. 사상의 자유가 개인의 ‘자연적인’(natural), 다시 말해 ‘타고 나는’ 권리인 이유는 그것이 어떠한 외부의 힘에 의해서도 강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독일민요의 한 구절처럼, “밤 그림자처럼 스쳐 날아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그 어떤 사냥꾼도 쏘아 떨어뜨릴 수 없는” 자유로움이 바로 생각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역시, 일시적으로는 힘을 통해 강제로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할 자유가 모두에게 조건 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생각이 그가 살던 시대의 대다수 동료 인간들에게는 낯설 뿐만 아니라, 너무도 위험스럽게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선구자였다. 혹은 전혀 미숙하지 않은, 단지 세상에 너무 일찍 나온 것뿐인 조산아였다. 그래서 시대와 너무도 많은 불화를 겪어야 했던 17세기의 불행한 천재였다. “시대와의 불화”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나이 스물 넷에 동족인 유태인들로부터 저주를 받으며 파문 당해야 했고, 그의 나이 서른 여덟에 써 낸 책으로 인해 “무신론자”, “신을 모독하는 자”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결국 그 책은 1674년 당국에 의해 금서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가 겪은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종교적으로 이단적이었던 그의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그 시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어떤 생각을 그가 미리 품었기 때문일까?


6. 스피노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근본적인 불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사실 개인과 집단은 언제나 애매한 긴장 관계 속에 있게 마련이다. 집단은 개인에게 이른바 ‘정체’(identity)를 갖게 해 준다.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흔히 각자가 속한 다양한 집단을 기준으로 자기의 정체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대학교 학생이라거나, 누구 집 아들이라거나, 군인이라면 어느 부대 소속 누구라거나, 또 대화 상황이 외국이라면 한국인이라거나 유학생, 혹은 배낭여행객이라는 등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대곤 한다. 그래서 이 집단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개인에게 정체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개인에게 감당하기 힘든 멍에가 되기도 한다. 첫째로 개인이 속한 집단이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경우에 그렇고, 둘째로 그 집단이 부과하는 정체를 개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그렇다. 이 두 경우에 개인과 집단은 긴장 관계에 빠지게 되는데, 첫 번째 경우에는 개인들이, 차별 받는 자기의 정체를 알아서 포기해 버리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집단이 부여하는 정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기독교가 탄압 받던 시절의 신자들이 그랬고, 식민 지배하에서의 피억압 민족들이 그랬으며, 지역 차별적 정권 하에서의 호남인들이 그랬고, 과거에 나라 없이 떠돌던 유태인들이 그랬으며, 오늘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렇다. 두 번째 경우에는 개인들이 자기의 정체를 부정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을 과감히 벗어나거나, 아니면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도 결코 그 집단을 벗어나지 못한 채 순응과 반항 사이를 오가는 정신 분열 증상을 겪는다. 하지만 개인에게 이 네 개의 카테고리는 선명하게 구분되기보다는, 항상 겹쳐서 나타난다.

7.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예를 하나 떠올려 보자. 한 인간이 있다. 그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한다. 남성이라는 외부에 의해 강요되는 성 정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오랜 고민 끝에 (수술과 같은 수단을 통해) 과감하게 자신의 성 정체를 버리고 다른 성을 취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집단을 적극적으로 벗어난 셈이지만, 동시에 성적 소수자라는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새 집단에 둥지를 틀게 됨으로써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항상 “성전환자”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과거를 숨기고 날 때부터 여성이었던 것처럼 행세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성전환자’라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료 성적 소수자들과 함께 오히려 더 똘똘 뭉쳐 이 차별에 맞서 싸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쩌면 그는 성적 소수자 집단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으면서, 또 그렇다고 그 속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냥 ‘여성’이고 싶은데, 주위의 사람들은, 비웃는 쪽이든 지지하는 쪽이든 그 어느 쪽에서건, 자신을 끊임없이 ‘성전환자’로서만 인식할 때의 갈등인 것이다. 그나저나 이 경우에 주위 사람들이 그를 “성전환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표현의 자유일까, 아니면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권 침해요 차별일까? 이 문제는 근대의 문제설정을 뛰어 넘는 것이므로, 일단은 스피노자가 제기한 문제, 즉 민족적․종교적 정체와 관련된 문제에 국한해서만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도록 하자.


8. 아무튼 스피노자는 유태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근대인이었다. 여기서 ‘근대인’이라는 말은 자신의 정체를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될 수 없는 자기 자신에서 찾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래서 또한 우리는 근대인을 ‘개인’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사람들과 어떠한 공통의 분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래서 도저히 ‘나눌 수 없는’(in-dividual) 고유의 존재. 이 근대적 인간 스피노자에게는 자신을 풀빵처럼 찍어누르려는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민족적 틀이, 그리고 17세기 유럽사회를 억누르고 있던 기독교라는 종교적 틀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 민족적, 종교적 틀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규범이라는 것이 무턱대고 순종하기에는 너무나도 비합리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속한 유태인이라는 집단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개인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이 집단의 포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독교라는 당시의 가장 완고한 철옹성에 스피노자는 부딪혔다. 스피노자에게 당시의 기독교는 자신과 같은 근대적 인간의 탄생을 가로막는 전근대적 미신이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개인으로서의 존립마저 위협하는, 국가 위에 군림하는 거대한 정치권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의 미신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또 교회의 권한이 축소될 수 있도록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었다. 인간을 그 어떠한 집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중립적인 개인으로 추상화하고, 또 국가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그 권위를 신이 아닌, 바로 이 개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하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택한, 자신과 동료 유태인들의 문제, 그리고 네덜란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쓴 책이 바로 <신학정치론>이다.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스피노자 (비르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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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당시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스피노자는 이 책을 1670년에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출판사와 그 장소까지 속여가며 출판했다. 하지만 그 책이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는 금새 알려졌고, 그 내용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난이 이어졌다. 라틴어로 쓰여진, 그래서 성직자들이나 교육받은 사람들 이외에는 읽을 수조차 없는 이 책을 스피노자를 따르던 동료들이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여 출간하려고 했을 때, 스피노자는 이 작업을 말렸다. 안 그래도 책을 두고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책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대중에게 읽혀졌다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난이 스피노자의 종교비판의 핵심은 간과한 채, 그가 전술적으로 택한 성서 해석의 내용에 대해서만 가해졌다. 즉 스피노자가, 그리고 그의 책이 신을 모독하며, 계시를 부정하고, 기적을 부정하는 등, 한 마디로 반종교적,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내리는 처방 자체가 오히려 문제로 느껴지는 법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개혁에 대해 항상 완강하게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는데,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니 개혁의 필요성이 느껴질 리 만무하다. 그런 이들에게는 보수 정권의 개혁 정책도 좌파 정권의 혁명적 정책으로 보이고, 대북 유화 정책도 친북 용공 정책으로 보이는 법이다. 아무튼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 반기독교적 입장이 용납될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아래에서 나는 이와 관련된 두 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10. 먼저 첫 번째 에피소드. 흔히들 ‘통일교’라고 부르는 종교단체가 있다. 공식 명칭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다. 외국의 백과사전에도 ‘통일교회’라는 별도의 항목으로, 또 ‘남한’ 항목 속에서도 한국인의 종교 가운데 하나로 이 종교단체의 합동결혼식 사진과 함께 언급될 정도로 외국에 잘 알려져 있는 한국의 신흥 종교이다. 이곳 독일에서도 가끔씩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문 종파를 아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 단체에서 1970년부터 30년 동안 목사로 활동한 박준철이라는 사람이 지난 2001년 1월 이 단체를 탈퇴하고서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 책에 대해 통일교 측은 “통일교의 명예를 훼손하고 선교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며 서적인쇄발매금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다. 이에 대해 법원은 1월 16일 판결에서 “동 서적이 통일교와 문선명을 비판함에 있어서 표현 중 과장되거나 부적절한 표현이 들어 있다고 판단되기는 하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통일교 자체를 비난하는 부분은 종교 자유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며, “문선명과 그 가족에 대한 언급 부분이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하는지는 별론으로 하되, 그것이 곧바로 직접적으로 통일교 교단의 명예 등을 침해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짓기 곤란”하고, 또 “다른 부분도 종교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나 통일교의 명예 등을 침해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정도에 이른다고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며 신청을 기각했다. 통일교 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책의 저자 박준철 목사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즉각 탄원서를 통해 박준철 목사에 대한 지원사격에 들어갔다. 위의 책은 “사실 적시에서의 표현의 문제이지 고의로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적시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문선명 집단(통일교)의 가르침과 지시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자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앞으로 문선명 집단(통일교)에 의해 더 이상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는 공익적 차원에서 문제점을 폭로하고 나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 사회도 최소한 법률적 차원에서는 특정 종교에 반대하는 것을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로 인정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일반 시민들의, 특히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은 어떨까? 
 
빼앗긴30년잃어버린30년(문선명통일교집단의정체를폭로한다)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지은이 박준철 (진리와생명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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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두 번째 에피소드는 그 내용이 조금 복잡하다. 먼저 2002년 6월에 동아일보사에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번역 출판했다. 책의 한국어 제목을 두고서 지나친 상업성의 발로라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 생각에는 어디까지나 한 해 먼저 출간된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를 염두에 두고서 붙인 썩 잘 된 제목 같다. 다시 말해 <예수는 없다>가 제기한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서 번역자가, 혹은 출판사가 의도적으로 ‘예수는 신화다’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한국에 소개한 듯하다는 것이다. 한 해 먼저 출간되었던 <예수는 없다>의 부제는 “기독교 뒤집어 읽기”이다. 어떻게 뒤집어 읽을 것인가? 저자가 선택한 전술은 예수에 대한 기존의 상을 뒤집는 것이다. 그래서 내세우는 주장이 “그런 예수는 없다”(No such Jesus)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살아가는 내 자신의 심각한 실존적 물음을 거치지 않은 예수,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다(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에게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그런’ 고정된 예수 상, 편협하고 배타적인 기독교를 만드는 주범이 바로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집착하는 ‘문자주의’(Literalism)라는 것이 또한 저자의 주장이다. <예수는 신화다> 역시 이 ‘문자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하필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향 땅에서라면 굳이 숨길 필요조차 없는 ‘영지주의’라는 입장을 교묘하게 행간에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괜히 낯선 땅의 독자들로부터 몰매를 맞게 되었다. 그것도 자기들 역시 그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말이다.

예수는없다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지은이 오강남 (현암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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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신화다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지은이 티모시 프릭 (동아일보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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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문에 실렸던 기사와 서평들을 통해 일단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나마 살펴보면, 이 책은 세계 신비주의와 고대 이교 신앙의 전문가인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가 공동으로 펴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역사를 신화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2천 년 가까이 전통 역사로 전해 내려온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현대 학계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여 신약의 예수가 신화적 인물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신약의 네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상 고대 이교도의 신화 ―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 신화를 유대인 식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예수의 전기는 놀라운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신비한 진리를 찾으려는 입문자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주기 위해 치밀하게 꾸며낸 영적 비유”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주장이 기독교에 대한, 혹은 최소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얼마나 엄청난 도발인지를 잘 알 것이다. 문제는 하필 이 책이 종교서적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용이 험악하더라도 독자들의 반응이 냉담했더라면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졌을 리 없었겠지만, 출판사인 동아일보사의 홍보에 힘입었는지 책은 종교서적으로서는 보기 드문 판매고를 올렸고, 따라서 교계로서도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3. 이미 앞의 에피소드에서 한 번 등장한 바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이번에도 역시 총대를 맸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원사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대 일 정면대결을 위해 직접 나섰다. 그리고 법정에 나선 것이 아니라, 힘 겨루기가 적나라하게 벌어지는 길거리로 나섰다. <뉴스앤조이>에 따르면, 한기총은 10월 1일 <예수는 신화다>를 출간한 동아일보사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통해 “책을 즉각 회수하고 반 기독교적 행위에 대해 사과하라”고 촉구했으며, 동아일보사의 절판 조치와 사과가 없으면 소비자 운동까지 전개하겠다는 등의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곧 이어 기독교계 신문인 <국민일보> 역시 사고(社告)를 통해 위의 책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에 국민일보는 목회자와 신학자들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폄하하는 주장의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기독교 진리의 본질을 밝히는 글을 준비”하여, 5일부터 이 “심도 있는” 글들을 “독자들께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고서는 그다지 심도 있지도 않은 글들을 연이어 게재하면서 어쨌거나 책의 내용과 함께 출판사인 동아일보사를 맹공격했다. “공신력이 있는”, “책임 있는 주요 일간지인”, 게다가 “민족정론을 표방하는” 동아일보사가 “책을 무책임하게 번역 출판, 센세이셔널리즘에 편승”하고 있으며,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판매에 열을 올리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그 자질과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정확하게 문제는 책의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한국 사회라는 맥락, 그리고 한국 기독교라는 특수한 맥락 속에서, 또 거대 일간지의 하나인 동아일보사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는 데 있었다.

14. 한국 사회, 한국 기독교라는 맥락 속에서 이 책을 바라본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학자 박태식 박사는 이 책의 내용이 결코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을 사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도 ‘성서는 성서로만 풀어야 한다’는 과거식 가르침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이런 사람들이 “성서의 배경도 모르는 채 자구에만 매달린다면 성서의 입체적인 이해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오히려 “<예수는 신화다> 류의 책에 매료될 수도 있는 노릇”이라며 문제의 원인을 한국 기독교인들의 문자주의적 태도에서 찾았다. 그리고 “요즘에 터져 나오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갖가지 문제점들을 고려해보면, 성서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가 언제보다도 절실”하며, “그런 면에서 <예수는 신화다>가 한국교회에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소설가이자 신화 관련 서적을 많이 번역한 바 있는 작가 이윤기 역시 이 책의 내용이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은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을”, “신화나 종교사의 전문가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그렇게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고서, 오히려 그에게 “정말로 충격적인 것은, 성경에 쓰여진 것은 한 마디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이 번역․출간되었다는 사실”이라며, “우리도 여기까지 왔구나 싶다”라고 자못 감격스러워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도 거기까지 온 것일까?


15. 다시 <뉴스앤조이>에 따르면, <예수는 신화다>를 출판한 동아일보사가 한기총의 성명 발표 후 10일도 채 되지 않아서 책의 절판을 결정했다고 한다. 동아일보사와 1,200만 기독교인의 대결구도로 몰아간 한기총과 국민일보의 승리인 셈이다. 그런데 2001년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언론탄압이라며 목에 핏대를 높였던 언론 자유의 수호자 동아일보사가 왜 이번에는 출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하지 않고 맥없이 꼬리를 내렸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하긴 무슨 특별한 신념을 가지고 펴낸 책도 아닌데, 책 몇 권 더 팔아보겠다고 기독교계 전체를 상대로 투쟁하는 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언론사로서 언론․출판의 자유를 위해 조금은 더 버텨주고, 조금은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도록 노력하고, 그래서 이 나라 언론․출판의 자유, 더 나아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넓히는 데 일조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무슨 수치인가, 동아일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이는 1948년에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18조의 내용이다. “모든 사람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구두, 서면 또는 인쇄, 예술의 형태 또는 스스로 선택하는 기타의 방법을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며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이는 1966년에 체결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9조 2항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좋은 말들이 실생활에서는 별로 맥을 못 추는 것 같다. 아니, 힘있는 자들의 권리 주장을 그럴듯하게 장식하는 데만 활용되는 것 같다.

16. 그나저나 그 동안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작가들과 영화배우, 가수들,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진보적 지식인들, “똘레랑스의 전사” 홍세화, 이들 모두는 도대체 왜 보이지 않는 걸까? 기독교인이 아니어서인가? 아니면 동아일보사가 괘씸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어느 한심한 기자의 표현대로 “이 책이 한국교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수층의 반발과 비난을 받아도 뚜렷하게 대꾸하기 힘들만큼 지나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가? 내용에 문제가 있으면 논박을 하면 될 일이지, 힘을 동원해서 절판을 시켜야 하나? 사실 그 책의 저자들이 외국인이었으니까 그 정도에서 끝났지, 만약 한국인이었다면, 그리고 국내 어느 교단 소속 신학교의 교수였다면, 당장 학교에서 쫓겨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렇게 쫓겨난 신학자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일반 대학에서 일어난 부당한 교수 해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는 언론과 지식인들이 유독 신학교에서 일어나는 중세적 이단 규정과 파문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국의 영문학자이자 친 팔레스타인 참여 지식인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박홍규 교수는 옮긴이의 글에서 1988년에 영국에서 출간되어 코란과 모하메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아랍인들을 분노케 했던 살만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에 대한 사이드의 반응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이드가 루시디를 비난하기는커녕 옹호하고 나선 점이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인권의 차원에서였다. 이 점에 관하여 표현의 자유가 이슬람의 굴욕감을 상회할 수 없다는 반박도 있었으나, 그는 “이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자유도 파기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한 폭력이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문화나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나섰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은 근거로 루시디를 변호했다고 한다: “<악마의 시>는 그의 자기표현이다. 그래서 누구나 그의 소설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공감 또는 최종적으로 거절할 기회를 부여받으리라.” 그런 자유가 우리에게도, 한국 사회에도 필요하지 않은가? 2002년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자유도 파기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한 폭력이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문화나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나서는 그런 기독교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오리엔탈리즘(현대사상신서6)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에드워드 사이드 (교보문고,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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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002년 가을, 나는 스피노자의 흔적을 찾아서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났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홀란드로 여행을 떠났다. 홀란드는 네덜란드의 여러 자치 주 가운데 하나,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둘이다. 북-홀란드와 남-홀란드가 각각 별도의 주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서 겨우 45년밖에 되지 않는 일생을 오로지 홀란드 안에서만 보냈다. 덕분에 어차피 넓지도 않은 네덜란드 땅이지만, 그다지 돌아다닐 곳이 많은 여행도 아니었다. 대부분 스피노자가 살았던 곳을 중심으로 여행을 했기 때문에, 남들이 흔히 가보는 곳은 오히려 제대로 구경도 못해보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하루는, 지금은 헤이그로 네덜란드 남자친구를 좇아 이사가 버린 독일 친구 아네뜨와, 또 언니이자 누나인 아네뜨를 만나기 위해 독일에서 찾아온 동생들과 함께 다 같이 암스테르담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잠시 스피노자 기행을 접어둬야만 했다. 아네뜨는 자기 동생들에게 자기네 역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며, 우리 모두를 ‘안네 프랑크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가을날 오전, 우리는 30분도 넘게 줄을 서가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 점령하의 암스테르담에서 안네와 그의 가족이 2년간이나 숨어 지냈다는,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해버린 한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청각 자료들과 함께 안네가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안네 가족과 또 다른 유태인 가족의 2년간의 은둔생활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독 가파르고 좁은, 전형적인 홀란드식 주택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우리 모두는 동족 독일인이, 그리고 동료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저지른 만행에 몸서리쳤다(<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아버지의 가필 때문에 오랫동안 그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었었는데, 1986년 네덜란드 법무부에 의해 그 사실성이 공식 확인되었다. 아버지의 가필을 벗겨내고 삭제되었던 부분들을 되살려낸 안네가 쓴 본래의 일기가 최근 한국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고 한다. 일독을 권한다).

안네의일기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안네 프랑크 (문학사상사,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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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방문객이 마지막으로 들러야 하는 곳은 다름 아닌 즉석 전자 투표소. 안네의 집 구경을 마치고 하나 둘씩 들어와 앉는 방문객들 앞에는 빨간 색과 파란 색 단추가 놓여 있다. 화면을 통해 제시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방문객들은 ‘차별 금지’와 ‘표현의 자유’ 가운데 하나의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천장에서 곧바로 빨간 등과 파란 등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제시되는 사건은 주로 ‘차별 금지의 원칙’과 ‘표현의 자유 원칙’이 서로 충돌하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쉽게 판단 내리기 어려운 그런 것들이다. 즉 영국 프로축구 구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어느 아랍인 선수에 대한 관중들의 인종주의적 반응과 차별에 대해 ‘차별 금지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표현의 자유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또 외국인에 대한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독일의 극우정당 민족민주당(NPD)에 대한 정부의 활동금지 신청과 관련하여 ‘차별 금지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표현의 자유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미국의 팝 가수 에미넴의 여성 차별적, 동성애 차별적 노래 가사에 대해서도 ‘차별 금지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표현의 자유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방문객들의 반응 역시 사안에 따라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우세한 원칙이 바뀌기는 하지만, 결코 어느 한 쪽으로 지지가 완전히 기울지는 않았다. 교지 <서강>에서도 한 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적이 있는, 혹은 발생할 수 있는 ‘차별 금지의 원칙’과 ‘표현의 자유 원칙’이 충돌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두고 설문조사를 해 보면 어떨까?


19. 미국에 대한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이후, 서방 세계가 즉각적인 보복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 독일에서 용감하게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반대하고 나선 정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극우정당인 민족민주당(NPD)이다. 뉴욕 쌍둥이 빌딩을 유태인 자본의 상징으로 간주한 이들은, 적의 적은 동지라고, 비록 누구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테러범들을 자신들과 한 편이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항상 싸고도는 미국을 자신들의 적으로 여겨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을 반대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사랑한다는 사람도, 반유태주의나 인종주의 얘기만 나오면 화들짝 놀라며 차별 금지를 외치는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이다. 적어도 배운 사람들은 그렇다. 그래서 집권 여당 주최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여는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그런데도 민족민주당과 같은 노골적인 극우정당들이 합법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 또 독일이다. 물론 정부와 의회가 공동으로 헌법재판소에 이 정당의 금지를 신청하긴 했지만, 이 문제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로 여겨 국가가 강제로 금지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과연 반유태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명하는 인종주의적 정당에게도, 그 정당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한, 집회․결사의 자유는 물론, 생각을 표현할 자유 역시 주어져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을 보일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이 개폐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한총련 수배자가 해마다 늘고 있는 상황에서, 극우적 정당에 대한 관용 여부를 묻는 것이 너무도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과연 우리는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자유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남에게는 아직 관대하지 못한 것일까?


20. 언젠가 정몽준 의원이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지지한다는 이화여대 학생에게 “여자는 군대에 안 가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말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기 스스로 한 사람의 개인이 되지 않는 한, 다른 한 개인과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만날 수 없고, 다른 개인의 문제를 인간 일반의 문제로 간주하고 함께 해결을 모색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집단적 정체를 밑천 삼아 이 집단에 기대고, 저 집단에 빌붙으며, 다른 집단을 차별하고, 또 다른 집단에 의해 차별 받으며 살아간다. 지역 차별, 남녀 차별, 학력 차별, 종교 차별, 인종 차별이 근대적 개인이 되지 못한, 그래서 끊임없이 집단이 부과하는 전근대적 정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람들에 의해, 대통령 선거라는 근대 국가 최대의 정치적 이벤트 가운데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이제, 개인에게서 교회나 민족과 같은 각종 집단이 부과하는 정체를 벗겨내고, 이렇게 집단으로부터 분리된 개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구성되는 중립적 국가에게 모든 판단을 맡기려 했던 스피노자의 전략은, 그럼으로써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성취하려했던 근대의 자유주의적 기획은 과연 실패한 것일까? 이 기획은, 그리고 스피노자의 전략은 이제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적절하게 탈근대가 논의되는 이 시대에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스피노자의 실천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예속 상태로 내모는 근본적인 원인들을 분석․비판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 그것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우리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 아닐까? 그리고 관용은 이 과정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도덕이 아닐까?


21. 17세기의 네덜란드가 종교적 피난민들에게 관대했던 것이 단지 그들의 넉넉한 마음 때문은 아니다. 넉넉한 마음도 사실은 물질적 조건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17세기에 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해온 피난민들이 결국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를 열었고, 2차 세계대전 때 자유를 찾아 독일을 떠난 유태인들이 오늘날 미국의 경제 성장과 학문 발전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듯 물질적 필요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관대함을 촉구하고, 또 그 관대함은 낯선 것들을 더 잘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우리의 변화를 가속화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아무 말 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16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이어졌던 네덜란드에서의 관용에 관한 대 논쟁의 결과로 전 사회가, 최소한 홀란드만큼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유동적으로 변했다. 그 증거는 카톨릭에 대한 박해가 느슨해졌고, 공인된 루터교회가 최초로 네덜란드 공화국 내에 세워졌으며, 1638-39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있던 세 개의 포르투갈계 유태인 공동체가 하나로 연합해 공식적인 회당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관용을 둘러싼 논쟁은 네덜란드 사회를 변화시켰으며, 오늘날의 자유롭고 관용적인 네덜란드 사회를 낳았다. 2003년 오늘, 자유의 범위와 관용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 한반도 전체를 뜨겁게 달구기를 희망한다.

※ 이 글은 서강대학교 교지 <서강> 제44호(2002년 겨울)에 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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