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정치는 어려워
연주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단상 ― 오르가니스트 박옥주의 멘델스존 연주에 부쳐 본문
※ 2008년 5월 오르가니스트 박옥주의 멘델스존 오르간작품 전곡 연주에 부쳐 쓴 글
설레는 마음으로 성당에 들어선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프로그램을 들여다본다. 연주자의 프로필과 연주곡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연주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시간이 되었다. 드디어 연주자가 오르간 앞에 앉는다. 청중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든다. 연주자가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연주할 채비를 한다. 잠시 몇 초 간의 적막이 흐른다. 그리고 연주는 시작된다.
연주는 퍼포먼스이다. 연주는 연주자와 청중, 그리고 연주가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을 전제한다. 연주를 통해서 연주자와 청중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그 속에서 반복될 수 없는 비가역적인 경험을 나눈다. 사람들은 연주에 참여하고 연주는 바로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는 지극히 사회적인 행위이다.
연주에는 다양한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연주되는 곡의 역사, 연주자의 역사, 연주되는 악기의 역사, 연주되는 장소의 역사, 연주에 참여하는 청중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사, 그리고 그 시간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연주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는 또한 지극히 역사적인 행위이다.
연주가 사회적인 행위이고 역사적인 행위인 한, 연주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행위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더 큰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의해서 부여되기도 하고,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바뀜에 따라서 변하기도 하고 퇴색하기도 하고 부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연주는, 연주자가 아무리 자신의 음악적 순수성을 주장하더라도,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저항이 되기도 하고 투항이 되기도 한다. 연주는 그런 의미에서도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다.
예술이 기계적으로 대량 복제되는 시대에 음악은 좀처럼 연주되지 않고 다만 소비된다. 음악이 연주되는 경우에도 오히려 음반이 원본이 되고 연주가 복제품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음악을 쉽게 소유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연주에 참여하지 않게 되고 점차 음악적 능력을 잃게 된다. 음악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대중의 음악적 소외는 청중 없는 연주를 낳는다. 동원되고 매수된 청중만 있는 연주가 단지 연주자의 경력만을 위해 기획된다. 그래서 오늘날 함께 모여서 음악을 하고 연주에 참여하는 것은, 그것이 체제의 순응 압력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심지어 정치적 의미마저 획득하게 된다.
2008년 5월 28일부터 6월 1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오르가니스트 박옥주는 멘델스존의 오르간 연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지난 2년 반의 시간 동안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에서 함께 음악을 하고 연주를 해 온 한 사람의 동료로서 나는 오르가니스트 박옥주가 그 동안 나와 다른 동료들에게 보여준 애정과 헌신에 감사하며 이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음악적 능력이 차별 없이 제고되기를 희망하는 한 사람의 시민이자 정치학자로서 나는 직장인들을 위한 열린음악회 형식의 이 연주회를 적극 지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연주를 통해서, 연주의 이러저러한 사회적·역사적·정치적 의미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음악에 대한 오르가니스트 박옥주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의 탁월한 기량이 한껏 드러나기를 바란다.
설레는 마음으로 성당에 들어선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프로그램을 들여다본다. 연주자의 프로필과 연주곡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연주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시간이 되었다. 드디어 연주자가 오르간 앞에 앉는다. 청중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든다. 연주자가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연주할 채비를 한다. 잠시 몇 초 간의 적막이 흐른다. 그리고 연주는 시작된다.
연주는 퍼포먼스이다. 연주는 연주자와 청중, 그리고 연주가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을 전제한다. 연주를 통해서 연주자와 청중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그 속에서 반복될 수 없는 비가역적인 경험을 나눈다. 사람들은 연주에 참여하고 연주는 바로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는 지극히 사회적인 행위이다.
연주에는 다양한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연주되는 곡의 역사, 연주자의 역사, 연주되는 악기의 역사, 연주되는 장소의 역사, 연주에 참여하는 청중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사, 그리고 그 시간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연주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는 또한 지극히 역사적인 행위이다.
연주가 사회적인 행위이고 역사적인 행위인 한, 연주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행위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더 큰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의해서 부여되기도 하고,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바뀜에 따라서 변하기도 하고 퇴색하기도 하고 부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연주는, 연주자가 아무리 자신의 음악적 순수성을 주장하더라도,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저항이 되기도 하고 투항이 되기도 한다. 연주는 그런 의미에서도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다.
예술이 기계적으로 대량 복제되는 시대에 음악은 좀처럼 연주되지 않고 다만 소비된다. 음악이 연주되는 경우에도 오히려 음반이 원본이 되고 연주가 복제품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음악을 쉽게 소유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연주에 참여하지 않게 되고 점차 음악적 능력을 잃게 된다. 음악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대중의 음악적 소외는 청중 없는 연주를 낳는다. 동원되고 매수된 청중만 있는 연주가 단지 연주자의 경력만을 위해 기획된다. 그래서 오늘날 함께 모여서 음악을 하고 연주에 참여하는 것은, 그것이 체제의 순응 압력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심지어 정치적 의미마저 획득하게 된다.
2008년 5월 28일부터 6월 1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오르가니스트 박옥주는 멘델스존의 오르간 연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지난 2년 반의 시간 동안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에서 함께 음악을 하고 연주를 해 온 한 사람의 동료로서 나는 오르가니스트 박옥주가 그 동안 나와 다른 동료들에게 보여준 애정과 헌신에 감사하며 이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음악적 능력이 차별 없이 제고되기를 희망하는 한 사람의 시민이자 정치학자로서 나는 직장인들을 위한 열린음악회 형식의 이 연주회를 적극 지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연주를 통해서, 연주의 이러저러한 사회적·역사적·정치적 의미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음악에 대한 오르가니스트 박옥주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의 탁월한 기량이 한껏 드러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