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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로만티쿠스, 혹은 낭만적 인간 본문

논문 에세이 번역 책

호모 로만티쿠스, 혹은 낭만적 인간

공진성 2012. 2. 10. 17:17

※ 2010년 10월 14일, 오르가니스트 박옥주의 슈만 오르간 작품 전곡 연주회에 부쳐 쓴 글

물결이 넘쳐 흐른다는 뜻의 한자어 ‘낭만’(浪漫)은 그 말의 서양 어원과 일견 무관해 보인다. 영어 ‘로맨스’(romance)는 영국의 어떤 정원 형태를, 또는 유럽 중세의 기사문학을 ‘로마식’(romantic)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것을 한자어로 음역한 것이 ‘낭만’과 ‘낭만적’이라는 말이다. 비록 이 말들이 음역된 것이기는 하지만, 물결이 넘쳐 흐른다는 한자어의 뜻이 ‘로맨스’라는 말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낭만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부정적으로 여겨진 이유가 바로 그 어떤 것의 과도함에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시작되었다. 17세기에 유럽에서 태동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확신에 기초하여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했다. 세계의 모습이 이성적이므로, 이성을 지닌 인간이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정확히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계몽을 향한 노력은 세계를 주술적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으며, 물질적인 번영 또한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성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배제하게 했다. 사랑과 같은 인간의 뜨거운 감정과 주체할 수 없는 열정, 그리고 광기(狂氣)가 이성에 의해 억압되고 부정되었다. 그것들은 이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는 요소였고 합리적 설명을 어렵게 하는 골칫거리였다. 계몽주의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거나 어떻게든 길들여서 이성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다.
 


이때 일군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소설가였고 시인이었고 평론가였으며, 화가였고 작곡가였고 철학자였다. 다양한 활동 영역에서 이들은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격정적인 사랑과 질풍노도와도 같은 젊음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자연의 힘과 위대함을, 그리고 그 앞에 홀로 선 인간을 그렸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드러냈고,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까지 미치는 직관의 힘을 믿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낭만주의자(romanticist)’라고 불렀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들의 과도한 주관적 감정 표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계몽주의자들에게 그것은 너무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비이성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우리들은 과도하게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 좋게 말해서 ― ‘낭만적’이라고 부르곤 한다. 한마디로 현실 감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현실인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현재의 모습만이 현실인가?



낭만주의자들은 그 낭만적 허구와 환상 속에 새로움이 있다고 주장한다. 낭만이 이성의 틀과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우며 파괴적인 것으로, 심지어 비도덕적인 것으로도 여겨지지만, 낭만주의자들에게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이다. 그러나 창조는 또한 파괴의 다른 이름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을 보면서 어떤 이는 인간의 창조적 힘을 보았고, 다른 어떤 이는 인간이 지닌, 쉽게 통제되지 않는 파괴적인 힘을 보았다. 현대 민주주의가 보이는 민중에 대한 이중적 태도 역시 여기에서 기인한다. 오늘날에도 낭만은 한 편으로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창조의 원동력으로 칭송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현실도피적이고 염세적인 공상으로, 파괴적이고 불온한 힘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래서 제도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탈낭만화하려고 하고, 때로는 타협책으로 낭만을 그저 창작을 본업으로 삼는 예술가들의 전유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복해서 낭만으로 귀의한다. 이성에 의해 꽉 짜인 세계에서 마음껏 숨을 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원초적 자유가 있는 그곳, 나 자신에게 온전히 충실해질 수 있는 곳, 낭만으로 귀의한다. 그것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를 두려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우리 ‘낭만적 인간(homo romanticus)’의 숙명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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