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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제국을 위한 변명

공진성 2012. 2. 10. 17:58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 이순희 옮김, 비아북, 2008.

제국의미래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지은이 에이미 추아 (비아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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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다시 ‘제국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소한 지난 10년간 출판된 책과 관련해서는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2000년에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이라는 책을 낸 이후로 ‘제국’에 관한 많은 말들과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전에도 물론 제국에 관한 말들과 책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개 과거 역사 속의 ‘제국들’이나 ‘제국주의’를 다루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은 현재 우리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재의 제국’을 다루고 있다.

1991년에 미국의 주도로, 그러나 유엔의 깃발 아래 인도적 명분을 내세우고서 치러진 걸프전쟁을 보고서 혹자는 국민국가를 초월한 ‘제국적 주권’의 등장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10년 후 2001년 9월 11일에 벌어진 테러와 뒤이어 감행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우리로 하여금 ‘제국’을 다시금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특히 미국과 관련시켜 논의하게끔 하였다. 미국의 제국적 지위나 역할에 대한 긍정과 부정으로 이루어진 이 논의에 중국계 미국인 2세이자 예일대학교 법대 교수인 에이미 추아는 또 하나의 견해를 추가하고 있다.

<제국의 미래>는 그 한국어 제목이 우리에게 전하는 느낌과 달리 제국의 ‘미래’에 관한 것도 ‘아메리카 제국’의 미래에 관한 것도 아니다. ‘제국’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과거를 얘기하고 있으며, ‘미래’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제국이 아닌’ 미국을 얘기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영국 제국에 이르는 과거 제국들의 역사로부터 미국의 미래를 위한 교훈을 도출하려는 시도이다. 추아가 제국의 흥망성쇠를 비교 관찰함으로써 도출한 결론은 ‘관용이 패권 장악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관용이 제국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최소한 필수조건이라는 말이다.

추아가 이 책에서 이론적으로 대적하고 있는 상대는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사무엘 헌팅턴이다. 헌팅턴은 지난 2004년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주로 형성된 미국’이라는 우리의 상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와스프(WASP, 백인-앵글로색슨-신교도)로 구성된 ‘개척자’와 이후에 미국에 건너온 ‘이주민’을 구분하고서, 미국인의 ‘순수한’ 정체성이 오늘날 ‘순수하지 못한’ 이주민들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헌팅턴의 불관용적 입장을 염두에 두고서 추아는 “제국의 쇠퇴가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반박한다(7).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이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 과학자들 덕분”이었고, 컴퓨터 분야에서 확보한 미국의 기술적 우위 역시 “세계 전역으로부터 재능 있고 진취적인 개인들을 끌어들이는 미국의 탁월한 능력이 빚어낸 직접적인 결과”(13)라고 다분히 결과론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추아는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9.11 이후 증가하고 있는 외국인과 이주민에 대한 미국의 불관용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추아에게 관용은 한편으로는 전 세계의 인재를 유인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 유입된 다양한 민족의 구성원들을 미국내에서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제한된 의미만을 가지는 수단이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 빗대어 추아는 ‘문화적 다양성’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문화상대론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주민들이 ‘로마의’ 문화와 제도에 동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통합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한다(93). 이 부분에서 추아는 미묘하게 헌팅턴과 다시 만난다. 정치적 통합에 대한 강조, 뒤집어 말해서, 정치적 통합의 실패로 인해 생겨나는 문화적·정치적 무질서에 대한 우려는 그가 제국의 쇠퇴 원인으로 ‘불관용’을 지목하면서 다시 그 원인을 ‘관용’에서 찾는 것과 관련된다. 추아는 “관용이 로마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고 평가한다(99). 정치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관용이 ‘붕괴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로마는 자신이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혹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또 결정적으로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붕괴되었다고 추아는 주장한다(106).

추아에게 미국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제국이 아닌 세계 최초의 초강대국이자, 군사 제국주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최초의 초강대국”이었다(15).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의 군사적 제국화와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가 미국의 제국화를 비판하는 이유는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 제국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명목상으로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제국이 될 수 없는데, 그것은 제국이 민주주의 이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압이라는 요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추아는 말한다(466).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미국은 제국이 될 수 없는데, 그것은 오늘날 군사적으로 제국을 유지하는 데에 이득보다 “돈이나 인명손실, 정당성 훼손, 증오심 유발” 등의 손실이 더 크기 때문이며(466), 더욱 중요하게는, 피정복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그들을 로마제국의 일부로 만든 로마와 달리, 민주국가 미국이 외국의 주민들을 정복하여 그들을 자국의 시민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추아는 주장한다(456).

제국의 의미를 이처럼 지나치게 법률적이고 형식적으로만 이해하는 추아는 민주주의와 제국의 양립가능성, 즉 식민지를 거느리지 않는 ‘비형식적 제국’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럼으로써 부시 행정부 8년간의 일방적 대외정책과 무관하게 오늘날 실질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민주국가 미국의 ‘제국적’ 권력의 문제를 간과한다. 실제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비용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군사회사와 그린카드 병사를 활용하여 인명피해가 직접적으로 자국 시민들에게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으며, 정보의 조작과 날조 차원에서가 아니라, 푸코적 의미에서의, 지식화한 지구적 권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당성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던지는 ‘미국은 제국일 수 없으며 제국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추아의 메시지는 언뜻 볼 때 미국의 지식인과 정책결정자들을 수신자로 삼아서, 제국화를 시도했던 미국의 연착륙을 촉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간접적으로 ‘아메리카 제국’을 욕망하는, 그러나 결코 그 제국의 시민이 될 수 없는, 그래서 때로는 좌절하여 증오심을 보이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향하여 미국은 결코 로마와 같은 제국이 될 수 없으므로 헛된 기대를 품지 말라고, 행여 실망했다면 그 탓은 헛된 기대를 품은 당신에게 있다고, 미국이 ‘제국적’ 권력은 행사하지만 책임은 질 수 없다고, 미국에는 그럴 능력도 없다고 무책임하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21세기는, 실재로서의 ‘제국’이거나 부재로서의 ‘제국’이거나 간에, 아무튼 ‘제국의 시대’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미래>는 늘 제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온 한국인에게 무엇보다도 ‘제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에 관한 진지한 고민을 촉구한다.

※ 강정인 교수와 함께 쓴 이 글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책&> 2009년 10월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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