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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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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느 남한 유학생의 베를린 이야기

공진성 2012. 2. 11. 11:00

1. 분단과 통일의 도시 베를린에 내가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99년 3월 1일 늦은 밤이었다. 3년도 더 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서만 당시의 느낌을 되살릴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사건 하나는, 그 즈음 한국 유학생 한 명이 유럽 어느 도시에서 여행 도중 북한 사람들에 의해 납치 당한 일이었다. 결혼과 함께 시작한 유학생활이니 만큼 신혼을 핑계삼아 없는 멋도 부려볼 수 있었겠지만(모든 새신랑이 적어도 한 동안은 말끔하지 않던가), 행여 돈 많은 집 자식으로 보일까봐 2000년을 바라보는 당시에 80년대 말 패션을 하고 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북한의 실질적인 위협 앞에서 나의 어설픈 관념적 친북(親北)은 그렇게 첫발부터 맥을 못 추고 말았다.

2. 남북한의 국호는 분단상황을 잘 모르는 이방인에게는 일종의 수수께끼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문표기는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고, 줄여서 ‘DPRK’라고 한다. 분단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는 정답을 말하기에 앞서 괜히 한 번 망설이게 하는 걸림돌이 되곤 한다. 하지만 독일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결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들 역시 사회주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임을 참칭(僭稱), 혹은 자칭(自稱)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독의 공식명칭은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이 민주주의이고, 남한은 그냥 공화국…”이라는 말만으로 이미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내 말을 중간에 끊으며 찌푸렸던 얼굴을 다시 편다. 그런데도 더러 북한 국호가 버젓이 국적으로 적혀 있는 공문서를 받아보는 일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곤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남한(Südkorea)’이라고 쓸 일이지.


3. 우체국에서 고국에 편지나 엽서를 보낼 때 나는 수신자 주소의 맨 마지막 줄에 ‘남한’이라고 꼭 구분해서 적는다. 그것은 ‘코레아’(Korea) 앞의 ‘쥐드’(Süd-)라는, 이 편지가 분명 독일에서 왔음을 알게 해주는, 이국적인 기호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약의 경우 손해를 보는 쪽이 내 쪽이라서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외국인에 대한 의례적인 질문에는 매번 그냥 '코레아'라고 대답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질문은 그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인 동북아시아인의 식별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코레아’라고 답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일차적인 궁금증은 해결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내게는 내가 ‘남한’에서 왔다는 사실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일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유학생과 외교관이 해외에서 줄줄이 망명신청을 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있던 유학생도 본국으로 소환될 판에 새로 유학을 나올 가능성은 더더욱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에서 왔는지 북에서 왔는지를, 마치 자신들의 상식이 그 정도는 된다는 듯, 꼬박꼬박 잊지 않고 물어보았고, 나는 오기로 한 번 북에서 왔다고 장난을 쳐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행여 유학 초장부터 엉뚱한 일에 휩쓸리게 될까봐 그냥 정직하게 ‘남한’에서 왔다고 여태껏 대답했다. 난 왜 농담도 못할까?

4. 사실 독일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남북한의 분단상황을, 한 때나마 분단되어 있었던 독일의 상황과 비교해 가며 술안주 삼아 이야기할 때를 빼고는 ‘남한 사람’이라는 나의 정체성은 그다지 일상 생활 속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도대체 지구상에 ‘북한’이라는 곳이 있기나 한 듯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언론의 선전선동에 의해 끊임없이 분단상황을 의식하고 남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면서 통일이라는 대의에 무언가 빚진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베를린에 오고 나서는 그런 나의 관심이나 의식도 점점 희석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생각마저도 현재적이기보다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통일에 대한 요즘 남한 사람들의 생각을 물을 때면, 마치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던 학창시절을 얘기하듯, 상당히 망설였다가 “당시에는…”이라는 단서를 꼭 붙여 말하게 된다. 한 마디로 ‘감(感)’이 없어진 것이다.

5. 독일이 통일된 지도 어느덧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통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 사이에 수도도 서부의 본에서 동부인 베를린으로 옮겨졌고, 기민당(CDU) 당수로 동독출신 정치인이 당선되는가 하면, 베를린에서는 옛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SED)이 민주사회주의당(PDS)으로 이름을 바꿔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또 동독 사람들은 ‘유로’라는 세 번째 화폐를 만져보며 말 그대로 통합된 유럽 땅에 살게 되었지만, 동독과 서독이라는 구분만큼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유효하다. 투표결과를 분석할 때도, 실업률,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등을 조사할 때도, 이 동독과 서독이라는 구분은 여전히 중요한 범주로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인 베를린만 놓고 보더라도, 아직까지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동베를린의 외곽 지역은 여러모로 그 옛날의 험악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혹은 오히려 물질생활의 격차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동서독 사람들간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동베를린 출신의 동갑내기 내 친구는 사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서 서로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적당히 그런 차이들 속에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미 몸으로 터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부각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삼는 정치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6. 에프엠(FM) 장학금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도 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말을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도 이 괴상한 한국어를 이곳에서 사용하곤 한다. 왜냐하면 독일 학생들이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날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장학금을 받고 있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유럽의 대학생들이 각종 형태의 장학금과 교환학생제도를 통해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2년 동안 외국대학에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그런 장학금과 교환학생제도의 수혜자인지를 묻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 가운데서도 독일 정부와 정당들이 주는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오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많게든 적게든 부모님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생활을 꾸려나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일찌감치 국가의 보조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가며 생활을 하는 유럽의 대학생들에게는 장학금도 받지 않고 딱히 돈도 벌지 않는 한국 유학생들의 한가한 생활이 그저 낯설기만 한 모양이다. 하지만 유학초기 아무런 장학금도 받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있던 나로서는 그들의 질문에 마땅히 멋진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처음 몇 번은 솔직하게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있다고 대답하다가, 언제부턴가 ‘에프엠 장학금’이라는 말을 생각해 내고서 그들의 예상되는 낯선 시선을 농담으로 분산시키곤 했다.

7. 아무리 고국에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사는 팔자 좋은 유학생이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구제금융의 한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나는 반 년 정도의 현지적응기간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서 내 손을 거쳐간 몇몇 일들 가운데 세종학교와 한인회에서의 일은 나에게 베를린 교민사회를 가까운 곳에서 관찰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세종’학교는 이름에서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이다. 그런데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보통 교민들에 의해 운영되고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보조를 받는 한국어 학교를 독일에서는 ‘한글학교’라고 부르는데, 내가 일하는 학교의 이름은 한글학교가 아니라 ‘세종학교’인 것이다. 그리고 베를린에는 ‘한글학교’라는 이름의 한국어 교육기관이 따로 존재한다. 따로 존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세종학교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도시에는 없는, 베를린에만 있는 단 하나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8. 하루는 가깝게 지내던 교민 아주머니 한 분께 세종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되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씀을 드렸는데, 되려 이 아주머니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진성 씨, 그 학교 친북계라는 거 알아? 조심해!” 색깔 겨루기라면 나도 누구 못지 않게 붉다고 생각했었기에, ‘친북계’라는 말에 별 거부감은 없었지만, 도대체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붉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한 동안 돈이 궁했던 나는 그 이후 베를린의 한인회에서도 일을 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내가 세종학교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인회장은 나에게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종학교, 아~거기 문제 있어요. ○○○ 사건 알죠?” 그러고는 30년 베를린 교민사회의 역사를 줄줄줄 늘어놓았다. 윤이상이 어쩌고저쩌고, 동백림 사건이 어쩌고저쩌고, 자신이 어쩌고저쩌고…. 그리고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나까지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라며 경고성 당부까지 하였다. 그밖에도 나는 색깔을 이유로 아이를 세종학교에 보내기가 꺼림칙하다는 사람들을 몇몇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것을 과연 이념갈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교민들 사이에 어떠한 이념적 차이가 도대체 있긴 있었던 것일까?

9. 세종학교와 한글학교는 원래 하나였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 10년 전에는 베를린에 세종학교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뿐이던 학교에서 이념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겼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일부 학부모들이 떨어져 나와 세종학교라는 또 하나의 학교를 베를린 땅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세종학교라는 곳에서 2년 가까이 교사로 일하면서 사실 나는 이념적으로 별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 이념적인 문제가 표면에 떠오를만한 일도 없었거니와, 오히려 사회과학자의 시각에서 봤을 때, 학교에 관계된 사람들의 이념적 입장이 오히려 없으면 없었지 결코 어느 쪽으로든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들이 말하는 이 학교의 친북성이 나에게는 적잖게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함께 부를 노래를 고르는 데 별다른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약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적극적으로 말려야 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개교기념 행사를 준비하며 어떤 노래를 부를까 토론하는 중이었는데, 반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자며 귀에 익숙한 노래를 정확한 가사와 함께 어깨춤까지 흥겹게 춰가며 부르는 것이 아닌가.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아직까지 대학에서 부르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농민가>를 도대체 아이들이 어디에서 배웠을까? 아이들은 이 노래를 해마다 5월에 서독의 작은 도시 빌레펠트에서 열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 민중제에 참가해서 배웠다고 했다. 나는 가사도 과격하고 선율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니 약간 서정적인 다른 노래를 부르자고 설득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혹시 그런 문제에 대해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흔한 한국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고. 나는 네이티브 스피커의 권위를 앞세워 아이들을 설득했고, 결국 우리는 <내가 찾는 아이>, <통일이 그리워>, <상록수> 등 상대적으로 점잖은 노래들을 불렀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수업시간에 <바위처럼>이라든가, 북한 노래 <휘파람>, <아직은 말못해>와 같은 노래를 배우고 불렀지만, 아이들에게서도 학부모들에게서도 나는 아무런 항의를 받지 않았다.


10. 내가 보기에 이념문제와 관련해서 세종학교의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히려 이념적 입장이 없는 데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반공이 국시(國是)인 나라에서 ‘반공’이라는 입장을 갖지 않는 것이 곧바로 ‘빨갱이’와 동일시되는 것처럼, 그러한 조국을 가지고 있는 베를린의 한인들 사이에서도 ‘반공’이 아닌 것은 ‘친북’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반공’이라는 부정적(否定的) 입장을 갖지 않게 되는 순간 ‘친북’으로 여겨질 수 있는 행동들도 별 거리낌없이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장이 없기는 교민사회의 주류, 즉 ‘반공’이라는 국시를 비교적 잘 따르는 대다수의 한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남주 시인의 말처럼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는 무엇을 ‘공’이라고 하느냐에 따라 “하루에도 골백번 엎었다 뒤집었다 모든 것이 제 좆 꼴린 대로”이니 어느 누군들 제대로 입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무슨 일만 있으면 쪼르륵 영사관에 전화해서 사안이 ‘공’에 해당하는 지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판단만 내려주면 ‘반’공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모범생의 태도로. 그런데 영사관의 (안기부/국정원 요원임에 틀림없는) 담당 직원들은 그런 교민들을 속으로 비웃고 경멸하며, 심지어는 대놓고 타박하기까지 한다. 자기들처럼 알아서 기지 못하고 귀찮게 일일이 물어본다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 이후 교민사회의 분위기도 관공서의 태도도 이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국 땅에서 ‘반공’이라는 국시와 ‘친북’이라는 위협 사이에서 자율성을 포기한 채 국가기관의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이 단 한 번의 정권교체와 짧은 햇볕정책으로 그들의 오래된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김대중 정부 이후 그 동안 조금 움츠러들어 있던 친북계 인사들이 여기 저기에 나서는 것을 보며 “저러다가 다시 정권이 바뀌면 어쩌려고 저러나” 하며 걱정 섞인 비난을 하곤 한다. 이 사람들에게 민주화는 일시적 현상이요, 반공독재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조국의 모습인 것이다. 그들이 조국을 떠나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11. 특기할 만한 일은 상당수의 교민이 간호사로 파견되어 온 여성들인데,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상당부분 남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나이의 한국 아주머니들과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젊은 나이에 독일 땅에 와서 전문 직업인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해왔고, 또 독일 사회 전반의 여권신장 분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은 자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남편의 영향을 크게 못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남편이 좌파이면 부인도 좌파, 남편이 우파이면 부인도 우파, 남편이 무관심하면 부인도 사회에는 별 무관심, 남편이 행동주의자이면 부인도 행동주의자, 남편이 말만 많으면 부인도…. 이런 식으로 부인들의 성향이 남편들의 성향과 비슷하게 같이 간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에서 제대로 갖지 못했던 사회의식 형성의 기회를 독일에 와서 남편 될 사람과 만나면서 비로소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또 좀 토론을 좋아하는가. 내가 만나본 행동주의적인 아주머니들의 남편은 또 하나같이 좌파요 행동주의자들이다. 반대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교민사회의 주류로서 회비나 기부금도 잘 내는 유복한 아주머니들의 남편은 또 하나같이 기민당(CDU) 지지자들이다. 여기까지는 남편들이 독일 사람인 경우이다. 남편이 (한 때 가졌던 국적을 기준으로) 한국사람인 경우는 또 복잡해진다.


12.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지리적으로 독일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동서독이 분단되어 있던 시절에는 베를린 역시 동과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서베를린은 붉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일종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 (평양의 남쪽 절반이 남한에 속해 있다고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동베를린의 경우는 동독의 수도였기 때문에 정치, 경제,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발달해 있던 반면, 서베를린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마저도 서독에서 비행기로 실어 날라야만 할 정도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터키와 같은 외국으로부터 대량의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안보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서 베를린 시민에게는 병역면제의 특혜까지 부여하였다. 그래서 많은 독일의 좌파 학생들과 행동주의자들이 베를린에 모여들게 되었고, 또 한국과 달리 동서베를린간에는 어느 정도 물자와 인구의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런 숨은 교류에 힘입어 서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서독의 다른 어느 도시와도 다른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런 도시 서베를린에서, 세계적으로는 냉전의 갈등이 첨예하게 진행되고, 남한에서는 유신독재와 반독재투쟁, 12․12와 5․18, 87년 6월 항쟁 등의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던, 70년대와 80년대를 산 한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또 어떤 의식의 변화를 겪었는지를 오늘날의 시점에서 우리가 상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눈에 비쳤던 이념갈등의 형태를 띤 교민사회 내의 문제들도 분명 이런 뒤얽힌 맥락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었으리라는 것이다.

13. 전대협에 1/4, 한총련에 나머지 3/4을 걸친 내 대학생활에서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임수경 씨를 비롯한 많은 전대협과 한총련의 대표들이, 그리고 소설가 황석영 씨와 문익환 목사 등이 북한에 갈 때 거쳐간 도시가 베를린이었으며, 전대협 출범식이나 한총련 출범식 때 전화 상으로 범청학련(범민족청년학생연합) 회의를 중계한 곳이 베를린이었고, 한 때 내가 책을 통해서나마 많은 영향을 받았던 외로운 망명객 송두율 교수가 사는 곳도, 결국 방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신방과 후배 하나가 쿠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후 방북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곳도 바로 베를린이었다. 그리고 박 홍 전 총장이 사회 곳곳에 주사파가 암약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의심의 화살을 맨 먼저 돌려댔던 대상 역시 베를린에서 공부한 박사들이었다. 나에게 베를린은 그런 곳이었다. 북한으로 가는 통로, 남북해외 삼자연대의 연결고리, 그리고 친북성이 물씬 풍기는 외로운 망명객들의 도시. 하지만 내가 베를린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 모든 드라마가 끝나고 촬영 세트마저 철거된 후였다. 이 해외로케 현장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을 법한 유학생들도 거의 귀국하고 없었고, 단지 누구누구가 조연이었다더라, 엑스트라였다더라, 누구는 출연료도 못 받고 찬 밥 신세가 되었다더라, 누구는 아직도 자기가 주연이라고 우긴다더라, 애초에 드라마는 내수(內需)용이었고 자막에는 국내연예인들 이름만 나온다더라 하는 각종 풍문만을 들을 수 있었다.


14. 독일에 온 지 한 일 년쯤 되어서였을까. 기껏해야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독일여행책자 수준의 관광만으로 마치 베를린을 다 본 것처럼 여기고 있던 나에게 베를린 토박이 친구가 햇볕 따사로운 일요일을 맞아 친히 동베를린을 구경시켜주겠다고 제안을 하였다. 그 친구의 긴 다리를 열심히 좇아가며 지금껏 가보지 않았던 동베를린 중심지의 뒷거리를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눈에 한글로 쓰여있는 누런 현판 하나가 들어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리익대표부”라고 되어 있는 현판 옆에는 홍보 사진들로 채워진 게시판 같은 것도 세워져 있었다. 그 안의 사진들 중에 김일성과 김정일 이외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은 여자유도 금메달리스트 계순희뿐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이익대표부만을 남기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수한 모양이었다. 독일과 북한이 다시 대사급 외교관계를 복원한 것은 2001년 3월 1일이었다. 그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삼일절 기념식이라는 것에 참석해 있었다. 먹고살자니 별 일을 다해 보는구먼, 하면서 한인회 주최의 삼일절 기념식을 뒤에서 조용히 진행하고 있었다. 행사 끝 무렵에 대사가 나와서 교민들에게 한 말씀 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때 대사의 입을 통해, 오늘 독일과 북한간에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고, 지금쯤이면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 건물 위에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대사는 그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한 후, “교민 여러분들께서는 지금까지 해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심하시면 됩니다”라고 은근한 당부를 덧붙였다. 나는 얼마 전 보게 되었던 북한 대사관 건물을 떠올리며, 혹시나 앞으로 그 동네를 지나다 보면 우연히 북한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를 가져보았다. 
  

 

15. 내가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9월 28일, 그러니까 네 명의 가수와 한 명의 피아노 반주자로 이루어진 평양예술단의 독일공연 자리에서였다. 나는 일찌감치 표를 구해놓고 공연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마는 그 생김새부터 시작해서 말투와 노래솜씨까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준비과정에서는 주최측의 정체와 공연의 정확한 성격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말들도 많았지만, 공연 당일에 보니 한인회 임원들을 비롯해 꽤 많은 교민들이 잔칫날처럼 행사를 거들고 있었다. 꽤나 큰 공연장이 빈자리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몸조심을 외치던 한인회장도, 북한을 몇 번이나 다녀왔다는 친북계 인사도 모두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국인 친구를 둔 덕분에 운 좋게 초대받아 구경온 듯한 독일 사람들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이런 저런 호기심으로 찾아온 유학생들도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뒤편 일반석에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맨 앞줄에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일찌감치 와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혹시 관객들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없나 하고 뒤돌아 볼 법도 한데, 그들은 시종일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이는 양복을 입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잔칫날에만 입는 남한 여성들의 치마폭 넓고 알록달록한 한복과 달리, 차분하고 결코 튀지 않는 그런 색상의 단정한 한복이었다. 그것만으로 그들이 북한사람임을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살찐 뒷목이 교포 사업가들 같은 인상을 풍겼기 때문이다.

 

16. 공연 시작이 가까워 오자 내 머리는 복잡해 졌다. 사회주의 공연 예술의 목적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혁명 일꾼으로 일으켜 세우는 데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오늘 공연을 최대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사회과학자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분석해 보기 위해, 내 대학시절의 끈끈한 기억들과 정서들을 머리 속과 마음 속에서 밀어내야만 했다. 나는 미리 배포된 프로그램을 통해 상대방의 레퍼토리와 앞으로 닥쳐올 감정의 파고를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 속의 냉각기를 열심히 돌리고 있을 때, 장내가 어두워지고, 무대 위의 조명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전주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가수들의 첫마디 가사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그 전까지 다잡았던 각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듣고, 편하게 울고, 편하게 소리치다 가자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나 태도는 이제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남이야 비웃건 말건, 남이야 중간에 일어나서 나가건 말건, 누가 나를 수상하다고 수군대건 말건, 그런 것들은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 갑자기 펼쳐진 무대가 내겐 더 중요해 졌기 때문이다.


17. 평양 예술단의 공연은 그렇게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면서 계속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무대로 나가 민요가수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고,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로 장단을 맞췄다. 그리고 “반갑습니다”로 시작한 그날의 공연은 “다시 만납시다”라는 노래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떠나갈 줄을 몰랐다. 앙코르를 듣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왠지 모를 서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앞에 앉아 있던 몇몇 관계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 가수들과 함께 손을 잡고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노래는 2절로 이어졌다. “우리의 소원은 자주, 꿈에도 소원은 자주….” 그 순간 관중들은 양분되었다. 아니 삼분, 사분되었다. 나는 더듬었다. 대학시절 집회에서 늘 그렇게 가사를 바꿔가며 불렀건만, 그날 나는 이상하게도 제대로 된 가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듯 계속해서 더듬기만 했다. 오히려 북한 가수들은 남한 사람들의 정서를 배려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고도의 계산된 행위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끝까지 “통일”로만 불렀다. 따라 부르지 않은 사람, 우리의 소원은 “자주”라고 부른 사람, 나처럼 우물쭈물 더듬은 사람, 3절까지 내내 “통일”이라고만 부른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이 그 날 베를린의 공연장에 함께 있었고, 지금도 한반도에 함께 살고 있다.

18. 공연은 끝났다. 아무리 아쉬워도 그만 일어서야 했다. 몇몇 사람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가수들과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카메라도 사실 준비해 갔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독일 외무장관의 싸인도 받아낸 내가 사진 한 컷 같이 찍자고 말 못 할 리 없건만, 도무지 그럴 용기가 안 났다. 어쩌면 그런 가벼운 마음이 아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모든 스태프의 이름이 화면 위로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는 심정으로 나는 출구 주위에서 무대 위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잊고 있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 관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가자 그 동안 점잖게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앉아 있던 맨 앞줄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배지를 달고 있었다. 나는 순간 머리 속으로 인사말을 연습했다. “안녕하십니까? 북에서 오셨습니까?” 아니, 이건 너무 상투적이다. “오늘 공연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너무 무난해. “반갑습니다.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어…. 계속해서 머리 속으로 인사말만 생각하다가 어느새 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건물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끝내 말 한 마디 못 붙이고, 손 한 번도 못 잡아보고, 그렇게 나는 처음 만난 북한 사람들과 헤어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가수들은 교민들의 초대로 다음날 공연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늦게까지 먹고 마시며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교민들이 되게 부러웠다.



19. 그 날 나는 서로 다른, 하지만 교묘하게 겹쳐져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세 개의 무대를 보았다. 북한이라는 독특한 정치체제가 독일이라는 서방세계에서, 그것도 남한이라는 분단 형제국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해서 마련한, 온갖 이데올로기로 가득한 정치적 무대와, 음악 공연이라는 형식의 예술적 무대, 그리고 우리들 마음속의 각종 정체 모를 감정들이 표출되는 심리적 무대를 보았다. 이 세 무대의 서로 다른 층위를 구분하지 못할 때, 그날의 공연은 형용할 수 없이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쓸데없이 진지한 관객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동과 갈등에 빠져들게 된다. 성악을 전공하는 한 선배는 그 때문에 공연 중간에 자리를 떴다. 공연이 끝난 후 시내 어느 술집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그 선배를 만났다. 나는 예의 없이 공연 도중에 자리를 뜬 그 선배가 못마땅해서 뭐라 따져 물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선배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 때문에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예술적 무대와 겹친 정치적 무대의 짙은 색채가 그 선배의 순수한 음악 감상을 마구 교란했던 것이고, 또 그렇다고 그냥 정치적 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 가수들이 가진 재능이나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그저 맘 편하게 한 번 욕해버리고 말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예술이 갖는 일반적 의미와 역할에 대해, 그리고 북한 인민예술의 내용적 형식적 특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그 선배는 그날 밤 노래를 부른 가수들의 발성법과 연기력, 가창력 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의 혼란스러운 심리상태를 술상 위에 올려놓고, 마치 투명하게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활어회를 한 점씩 젓가락으로 집어먹듯, 조목조목 따져보기도 하고, 또 따져봐도 어쩔 수 없는 시린 마음은 그냥 술로 어루만져가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엔 술기운과 함께 “안녕히 다시 만나요” 하며 마치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마지막 노래를 부르던 전경란 동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20. 나는 의심스럽다. 과연 역대 정권의 대북 밀/특사들이 일당 만 원에 길거리에서 “우익은 죽었는가”를 외치는 반공우익투사들과 똑같이 북한에 대해서 생각했을까? 평양에서 김일성 부자와 사진을 찍고, 그걸 사무실 어딘가에 역대 정권의 대통령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과 나란히 걸어놓았을 언론사 사주들이 자기들 신문을 읽고 “북한에 퍼주는 쌀이 총탄 되어 돌아온다”고 외치는 가엾은 시민들과 똑같이 북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까? 과연 그럴까? 누구는 적의 수괴와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는데, 왜 나는 기껏해야 하수인밖에 되지 않는 사람과도 말 한 마디 못해보는가? 단지 내겐 당국의 허가가 없기 때문일까?

세상 많은 일을 우리는 경험 없이 머리만으로 깨우칠 수 있다. 수학 공식들이 그렇고, 각종 물리 이론들이 그렇다. 구체적으로 그 공식들과 이론들이 실생활 어디에 적용되며, 또 어떤 현상에서 도출된 것인지 몰라도, 우리는 관념적으로 각종 수의 법칙과 물리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 경험은 법칙성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법칙성은 실생활에서 경험의 형태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따라서 경험과의 정합성 여부로 우리는 어떤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경험에 부합하지 않으면 더 이상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경험 자체를 기만하는 진리 아닌 진리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베를린에서의 경험은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각종 이데올로기로부터 나를 조금은 자유롭게 해 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더듬고 있다. 말을 더듬고, 행동을 더듬고, 시선을 더듬고, 생각을 더듬는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 강단에 설 때에는 더 이상 더듬지 않으면 좋겠다.

※ 이 글은 서강대학교 교지 <서강> 제43호(2002년 여름)에 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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