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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질투의 정치학

공진성 2020. 2. 14. 18:15

우스갯소리로 인류 최고의 난제라고 부르는 문제가 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도대체 뭘 기대하고 묻는 것일까? 3자는 별 부담 없이 물을 수 있지만, 그런 질문을 받은 아이도, 아이의 부모도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한다. 대답에 따라 서운해 할 엄마나 아빠를 걱정하여 대답을 기피하기도 한다. 별 생각 없이 엄마나 아빠가 더 좋다고 대답하면, 아이에게서 선택 받지 못한 엄마나 아빠는 내심 서운하다.

우리는 그 반대로 묻기도 한다. 여러 명의 자식 가운데 어느 자식이 더 예쁘냐는 질문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지만, 사실 아픈 것과 예쁜 것은 다르다. 행여 어느 한 자식을 다른 자식보다 더 예뻐하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봐서 부모는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렇지만 자식들은 끊임없이 부모의 공평한 마음을 의심하며 부모의 애정이 어느 한 자식에게 쏠리는 것을 견제한다. 엄마는 오빠만 좋아해, 아빠는 딸을 더 예뻐해, 엄마 아빠는 막내라고 누구만 편애해, 첫째라고, 아들이라고 누구만 편애해, 이렇게 말하며 항의한다.

출산율이 1에 가까워지면 이런 문제가 사라지게 될까? 모든 집에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세상이 와도 부모의 사랑에 대한 자식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남편이나 아내가 한 명이라고 해서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자식도 부모가 남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또는 부모로서 자-녀를 똑같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람은 똑같은사랑을 원하지 않고, ‘차별적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면 사실상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차별적인 사랑이고 배타적인 사랑이지,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다.

배타적 사랑과 무차별적 사랑을 양 끝에 놓고 선을 그어보자. 왼쪽 끝에 있는 배타적 사랑의 관계가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면, 오른쪽 끝에 있는 무차별적 사랑은 인류 전체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래서 그를 사랑하지만, 단 한 사람만으로는 부족하고 인류 전체는 버겁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애정 관계는 둘에서 시작해 점점 더 많아진다.

인류는 배타적 애정의 단위를 꾸준히 넓혀 왔다. 그러나 부부나 가족 관계를 단순히 확대하기보다는, 핵가족 자체가 부부 관계와 부모-자녀 관계의 이중적 결합이듯이, 여러 애정 관계를 중첩시키면서 확대해왔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애정 공동체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제도와 관념이 발전한 결과,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예컨대, 자식이나 부모, 친구, 직장 동료, 이웃, 동족, 이방인 등)다른 차원에서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남자사람 친구여자사람 친구라는 말은 남자친구여자친구그냥 친구와는 다른 범주임을 표시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부 사이에 하는 말이 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냐.” 이 말 역시 가족부부는 다른 범주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런 범주 구분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지 않고 개인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경우에는 유효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애정 관계임을 숨기려는, 또는 애정이 식었음을 감추려는 변명이나 거짓말로 여겨지는 것이다.

애정 관계의 여러 차원은 개인이 임의로 구분할 수도 없지만, 또 하나로 합칠 수도 없다. 우리는 직장 동료밖에 모르는 사람, 친구밖에 모르는 사람,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 아내나 남편밖에 모르는 사람, 자식밖에 모르는 사람에 대해 불평하곤 한다. 애정이 한 차원에 집중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애정의 차원에서 배타적 사랑을 원하는 것과 다르다. 각각의 차원에서 마땅히 쏟아야 할 제 몫의 애정을 쏟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첩되는 애정의 영역들에서 필요한 만큼의 애정을 쏟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애국자가 집에서는 제대로 아내나 남편, 부모나 자식의 역할을 하기 힘들다.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도, 친족 관계도, 이웃 관계도, 동료 관계도, 동족 관계도 모두 배타적 애정에 기초한다. 그리고 각각의 애정 관계는 질투의 가능성을 늘 내포한다. 그리고 질투는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인간은 관계의 종류를, 애정의 영역을 구분해왔다. 인간들의 평화로운 공존은 어쩌면 이 구분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범주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받아들여질 때, 남의 자식을 이웃의 한 사람으로 사랑해도 내 자식이 질투하지 않을 수 있고, 애인과 친구가 범주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받아들여질 때,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설령 그가 이성이더라도, 질투를 유발하지 않을 수 있다.

남과 북의 민족은 화해의 시대를 앞두고 있다. 지난 427일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오는 612일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된다면, 남과 북은 그동안의 적대를 청산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갈등 요소가 숨어 있다. 바로 국민민족이라는 상이한 애정 공동체의 단위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국민과 민족을 동일시해왔다. 통일에 대한 염원도 그런 생각에 기초한다. 그러나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실상 다른 국민으로 살아왔다. 이 두 개의 범주 구분이 남북의 모든 사람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국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 있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경제적 지원에 오히려 남한 국민들이 서운해 할 수 있다. 그래서도 남한 정부는 그것을 투자라고 표현하지만, 남한에도 국가적 투자가 필요한 곳이 아직 많다고 여기는 국민들은 쉽게 그 서운한 감정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발흥하는 극우적 움직임도 외국인에 대해 내국인이 느끼는 이런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 배타적 사랑을 욕구하는 우리의 감정이다.

사랑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 기존에 사랑을 받던 사람의 질투와 상실감을 유발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라면, 증오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대부분의 애정 공동체는 사실상 증오 공동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공통의 적을 통해 자신들이 한 편임을 확인한다. 다른 집단과의 경쟁을 통해 자기 집단의 결속을 다진다. 과거 남한의 반공세력은 북한을 적대시함으로써 남한 내부를 단결시키려고 했다. 냉전 시절에는 적대와 증오를 통한 내부 통합이 그럭저럭 가능했지만, 냉전이 끝난 후에는 그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애정의 공동체는 질투라는 감정을 매개로 삼아 사랑의 확장과 미움의 확장이라는 팽창과 수축 운동을 반복한다. 다층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관계는 넓어지지만, 그 일에 실패하고 질투심이 커지면 서로 유익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다시 좁아진다. 일부다처제 또는 일처다부제가 사랑의 공동체를 넓히는 성공적인 방법이 아니듯이, 이웃집 자식을 내 자식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공동체를 넓히는 성공적인 방법이 아니듯이, 외국인을 내국인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성공적인 방법이 아니듯이, 민족을 국민과 똑같이 여기는 것도 대한민국이라는 애정 공동체를 확장하는 성공적인 방법은 아닐 수 있다. 여자사람 친구/남자사람 친구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국민과 민족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으면서도 공존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2018년 5월 25일 조선대학교 장미원에서 진행된 광주MBC 라디오 <투데이 광주>의 보이는 라디오 특집 방송을 위해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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