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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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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에세이 번역 책

내가 지금껏 헌혈을 하지 못한 이유

공진성 2024. 9. 7. 16:51

내가 마지막으로 헌혈을 한 것은 1998년이다. 한때는 나도 기꺼이 헌혈에 동참하는, 피 뽑는 것 정도는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한 청년이었다. 문제는 1999년 독일로 유학간 뒤에 생겼다. 영국발 광우병 사태가 유럽 전체를 휩쓸던 2000, 유럽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유통되던 쇠고기를 전량 수거해 폐기해야 하느냐 마느냐 논쟁이 일었다. 쇠고기 소비가 급감하고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염려가 급증했다. 외국인 유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건강을 염려했다.

어느날 선배와 저녁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 안주로 소시지를 시키자 선배가 먹지 않았다. 쇠고기가 섞여 있을지 모르는 소시지조차 먹기 불안했던 것이다. 당분간 쇠고기는 물론이고 육류 자체를 되도록 먹지 않으려던 선배에게 농담으로 말했다. “이 소시지 먹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소시지 안 먹고 혼자 오래 살고 싶어요, 아니면 일찍 죽더라도 나랑 같이 소시지 먹으면서 즐겁게 살고 싶어요?” 그날 선배는 소시지를 먹었다.

2006년 귀국한 나는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길가에 서 있는 헌혈 차에 올라탔다. 오랫동안 다하지 못한 의무를 이행하려는 듯 헌혈 의사를 밝혔다. 담당자가 이러저러한 주의사항을 안내해 주었다. 7년 사이에 바뀐 내용이 있었다. “광우병 발생 국가와 위험성이 높은 국가로 지정된 34개 유럽 국가에서 1980년부터 현재까지 5년 이상 체류했을 경우 헌혈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헌혈을 할 수 없었고, 지금까지도 헌혈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헌혈 금지 기준을 완화하려고 한다는 보도를 봤다. 헌혈을 통한 인간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매우 낮기도 하고, 나처럼 헌혈을 할 수 없는 사람 수가 자꾸 늘어서 헌혈량이 갈수록 부족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가지 근거이다. 하나는 과학적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판단이다. 깨끗한 물이 있으면 좋지만, 아예 없거나 부족하면 조금 덜 깨끗한 물이라도 우선 사용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그런 판단을 내려야 한다. 정치적 판단에 도움을 주는 것이 과학적판단이다. 즉 위험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깨끗한 물이 없다고 해도, 마시면 바로 죽을 오염수를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탈수 증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마시면 당장 죽을 독극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 그러나 탈수로 죽는 것보다는 배탈이 날 위험이 있더라도 오염수를 마시는 편이 더 낫다. 당연히 깨끗한 물을 두고 굳이 오염수를 마실 이유는 없다.

지난달 24일은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생긴 오염수를 방류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대통령실은 오염수가 아니라 오염수라는 괴담을 방류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라고 야당을 비판하며 사과를 요구했다. 취임 때부터 과학을 강조하고 사이비 지식인들이 유포하는 가짜 뉴스를 비판한 대통령과 그 핵심 관계자들의 생각은 그런 모양이다. 이들에게는 광우병 사태도 비과학적 사고에 근거한 괴담일 뿐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번 강조하는 것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의 근거가 되었던 광우병 괴담이다. 정말 그때의 우려와 지금의 우려에는 아무런 과학적근거도 없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껏 왜 헌혈을 하지 못했고, 조만간 왜 다시 할 수 있게 될까?

자유시장 원칙 아래서도 각국은 다양한 근거를 들어 자국 시장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입 장벽을 만든다. 건강을 해칠 위험도 그런 여러 규제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국민의 위험 인식이 높은 나라는 그만큼 수입 장벽도 높다. 그것이 협상 수단이 되기도 한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중국산 배터리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 너그럽다 못해 적극적으로 그 위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도대체 왜? 후쿠시마 산 수산물 수입 규제를 풀어주기 위해 국민의 정당한 우려를 괴담으로 치부하며 비판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혈액 공급이 부족해서 수술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면, 아무리 위험이 내재해 있더라도 덜 위험한 순서대로 금지를 푸는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후쿠시마산 해산물 수입 제한도 풀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과연 어떤 필요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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