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정치는 어려워

[칼럼] 이 공연은 과연 누구의 비용으로 치러지는 걸까 본문

논문 에세이 번역 책

[칼럼] 이 공연은 과연 누구의 비용으로 치러지는 걸까

공진성 2016. 1. 10. 11:44

이 공연은 과연 누구의 비용으로 치러지는 걸까

 

지난 목요일 저녁 문화예술회관에서 시립합창단의 엘리야공연을 봤다. 합창음악을 워낙 좋아하고 특히 직접 공연해본 곡이어서 기대가 컸고 그만큼 실망도 컸다. 세 개의 다른 연주단체가 함께해서 그런지 호흡이 잘 맞지 않았고 화려한 경력의 독창자들끼리의 하모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연습하지 않은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못마땅한 것 투성이이지만 비판하기가 무척 미안한 것은 그 이면의 악조건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드러내놓고 머리를 맞대어 함께 해결책을 모색해보자는 뜻에서 그 악조건의 일부를 지적해 보려고 한다.

 

 

 

 

문화예술이 성숙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하부구조도 필요하지만 인적 하부구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문화예술을 배우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교양 있는 중산층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문화예술을 배우고 향유할 수 있으며, 그렇게 중산층이 교양을 갖춰야 문화예술이 부흥한다. 중산층에서 자연스럽게 전문 예술가가 자라나오지 않으면 예술가는 유복한 개인적 환경의 산물이거나 대기업과 정부의 인위적 선발과 육성의 결과가 된다. 물론 부모와 형제의 희생을 발판 삼아 전문 예술가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길러진 예술가들이 한국 사회에서는 활동할 기회를 얻기가 어렵다. 문화예술을 자발적으로 배우고 향유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공연장에 가보면 입장료가 저렴한데도 제값 주고 표를 사서 입장하는 관객이 드물다. 표를 파는 창구는 늘 초대권을 수령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렇다면 공연의 비용은 도대체 누가 지불하는 걸까. 예술가들은 제자들에게 표를 반강제로 판매하기도 하고 자기 돈으로 구입하거나 출연료 대신 떠안아 지인들에게 뿌리기도 한다. 공연의 기획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청중을 더 많이 동원할 있는 사람을 출연자로서 선호한다. 동원된 청중들로 가득한 공연에서는 무비판적 환호와 갈채가 넘쳐난다. 한국인 예술가들이 외국의 유명 공연장에서 연주할 때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교민들이 동원되고 애국적 환호와 갈채가 쏟아진다. 그러므로 청중의 다소, 박수의 강약과 지속 등은 공연의 객관적 수준을 평가할 척도가 되지 못한다. 객관적 평가 능력이 없거나 평가할 의사가 없는 청중에 의해 예술가는 무의미한 상찬을 받고 공연은 학예회가 된다.

 

 

 

 

부족한 예산을 아껴가며 힘들게 훌륭한 기획으로써 공연을 이어가는 시립합창단을 비롯한 예술단을 나는 아끼고 사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심각하다. 모두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 위기만 모면하면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무료로 배포하는 공연 안내 책자의 여덟 면 가운데 두 면에 단체장의 사진과 영혼 없는 인사말이 실리고 다른 세 면에 연주자 소개가 실리는 현실이 공연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대기업이 후원하면 광고가 몇 면 추가로 실리겠지만 공연의 본질인 작품 자체의 소개가 부실한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작곡자가 누구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음악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기획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릴 필요가 없다. 그것을 알고 싶어서 온 청중도 별로 없을 테니까.

 

문화예술을 배우고 향유하기 위해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려는 교양 있는 중산층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는 시민의 문화예술 향유권을 보장한다는 명목 아래 비용의 일부를 대신 지불하고 예술가들은 자존심을 버리고서 자신들의 공연을 관람할 관객을 스스로 동원한다. 정부의 재정지원에 의존하는 예술단은 공연 안내 책자에 작품과 창작자에 대한 소개보다 시장 소개를 먼저 싣는다.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공연이 사실상 기업의 광고 매체가 되는 사정과 다르지 않다. 청중이 출연자를 보러오는 공연의 안내 책자에 연주자 프로필이 더 비중 있게 실리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교양 있는 중산층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문제의 해결은 안타깝지만 더욱 요원해 보인다.

 

※ 이 글은 2015년 11월 2일자 <광주드림>에 칼럼으로 실린 것입니다. (링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