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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새로운 위험, 낡은 국가

공진성 2016. 1. 10. 11:10

새로운 위험, 낡은 국가: 메르스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과제

 

국가의 본질은 위기시에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전쟁이나 내란으로 인해 국가의 지위가 흔들릴 때 그 본질이 결국 폭력임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외적의 침입에 의한 전쟁이나 혁명 세력이 일으키는 반란 따위가 아닌 것 같다. 메르스 바이러스의 확산이 가져다준 공포는 현대의 위험이 무엇이고 국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과거에 국가는 지배자 또는 지배집단의 소유물이었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자신들이 국가를 외적의 침입과 같은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그럼으로써 그곳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피지배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지배집단은 그 보호의 대가로 잉여생산물을 수취하여 자신들의 생계와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위기시에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웠다. 그 위험감수의 대가가 평상시의 높은 지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발전 과정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물이던 국가를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객관적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평상시에 그 힘을 가지고 국민을 억압하여 결국 국가 자체를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오늘날 고도로 발전한 국가는 스스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그 국가 안에서 법이 정하는 역할과 기능을 그저 수행할 뿐이다. 모든 것은 법에 따라, 심지어 법의 수정조차 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입헌국가와 절차적 민주주의는 과거의 큰 위험을 통제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의도치 않게 조직적인 무책임성을 또한 낳고 있다.

 

 

 

 

메르스 확진 환자와 감염 의심 대상자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정부의 격리 조치를 무시하고 거부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강제로 격리시켜야 한다. 국가의 본질이 폭력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일을 해야 할까?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직접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야 한다. 그 사람은, 임기만을 무사히 마치고 싶어 하는 대통령과 고위공직자가 아니라, 그저 재선에만 관심이 있는 직업정치인이 아니라, 그 위험에 직접 노출되어 있는 의사와 간호사,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켜야 하는 시민, 그리고 그들을 통제해야 하는 하급공무원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는 그 어떤 노블한 지위와 명예도 없고, 결정의 권한도 없다.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크다. 현 정부를 운영하는 개인과 집단의 무능 탓도 없지 않지만, 과거의 큰 위험에 맞게 발전한 현대 국가가 조직적으로 무책임하고 새로운 위험에 대해 구조적으로 무능한 것은 다분히 필연적이다. 문제는 현대의 새로운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새로운 형태의 권력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협치(거버넌스)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위험이 그저 한국에서, 내 임기 동안에, 내 주변에서 터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대권 장악을 위해 가상의 큰 위험을 시대착오적으로 내세우며 헛된 말싸움을 벌일 때가 아니다. 불평등한 위험 분배와 권한 분배의 상태를 깨뜨리고, 새로운 위험 속에서 직접 위험을 감수하며 공공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유능한 새로운 권력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 이 글은 2015년 6월 8일자 <광주드림>에 칼럼으로 실린 것입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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