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려워
다음 학기 수업 구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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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학기 말이면 다음 학기에 개설할 과목들에 대한 구상을 합니다. 학교도 서둘러 과목명과 시간표를 확정하길 요구하고, 수업계획서도 일찌감치 작성하여 게시하게끔 합니다. 정작 학생들은 대개 시간에 맞춰 수강할 과목을 고르거나 (좋은) 학점 얻기가 쉽다고 소문난 과목을 찾아 시간표를 짜지만, 교수는 학생들이 수업계획서의 내용을 보고 순수하게 내용에 대한 관심만으로 수강신청을 하기를 바라며, 다음 학기 수업계획서를 작성합니다. (정말 순수하게 내용만 보고 학생들이 수강신청할 때 자신의 수업이 오히려 폐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ㅋ)
아무튼 수강신청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들은 매우 많지만, 그 변수들을 어차피 교수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교수는 그저 최소한의 자기 능력 범위 안에서 수업 내용을 계획하고 나름대로 요령껏 시간을 배치합니다.
수업 시간은 학과 내에서 이른바 '짬밥' 순으로 정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학생들 정신이 그나마 가장 또렷한 때에, 학생들이 선호하는 시간에 원하는 과목을 개설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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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학기에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중입니다. <정치사상사>는 두 학기 프로그램입니다. 2012년에는 페미니즘 정치사상사를 가르쳤습니다. 토론 형식을 도입했는데, 반응은 반반인 것 같습니다. 마니아 층을 보고 계속 갈 것인지, 더 저변을 넓혀야 할 것인지 고민입니다.
2013년에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정치사상의 역사를 서술해볼까요?
2010년 2학기에, 정치사상의 내용과 형식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사상가들의 사상과 함께 그 사상이 표현되는 방식, 즉 '대화', '연설', '주석달기', '문학/소설', '과학', '해석/평론' 등의 형식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종의 '메타' 분석이어서 학생들에게 조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사상사라든지, 페미니즘 정치사상사처럼 역사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는 주제 없이, 형식에 주목하여 설명하는 것이 낯설뿐만 아니라, 사상의 내용이 파편적으로 제시되어서 강의가 어수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다음 학기에 다시 한번 시도한다면, '신화'를 추가하여 두 학기에 걸쳐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과 그것을 표현한 방식을 살펴볼까 합니다.
정치사상사를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근대 이전의 정치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근대(산업화) 이후의 정치사상을 가르치는 것보다 힘들뿐만 아니라,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더 유용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근대 이전의 정치사상이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현실 적합성이 떨어집니다. 순수하게 철학적 훈련을 하는 데에는 유익하지만, 21세기의 현실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덜 유용한 것 같습니다.
20세기 말에, 소련이 무너지고, 마치 이념의 대결이 끝난 것처럼 떠어들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이념은 중요해 보이고, 사람들은 이념적 대결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사상사를 '보수'와 '진보', 또는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의 정치사상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당연히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됩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유럽에서 벌어진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결을 한 학기 동안 살펴보고, 한국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결의 역사, 그리고 '중도'의 이념적 지위 등을 또 한 학기 동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치사상사> 1과 2 수업의 내용과 관련해 위의 두 가지 안을 두고서 고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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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특강>은 제가 연구하고 있는 '핫'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매우 편리한 과목입니다. 무엇을 '특별히' 강의할 것인지 제가 임의로 정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다만, 4학년 수업이어서 수강생이 적다는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 동안 '폭력' 문제를 계속 다뤘습니다. 2011년에는 훨씬 사상사적으로 다뤘고, 2012년에는 전쟁과 관련해서 다뤘습니다. 2013년에는... 내가 쓴 두 권의 개론서 <폭력>과 <테러>를 중심으로 강의를 할까도 생각하고 있고, 앞에서 언급한 '보수'와 '진보'의 문제를 이 특강에서 다루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치사상특강: 보수주의 정치사상>, 이 정도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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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정치학 수업이 제일 문제입니다. 다른 교수님들은 이 수업을 이용해 정치학에 대한 기초가 부족한 학생들의 지식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게 한 학기만에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내 생각에는, 포지티브하게 지식을 습득케 하는 것보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잘못된 지식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단, 수업의 방향이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업의 방향과 사실상 연결되어 있는 문제인데,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도 문제입니다. 다음 학기에는 1학년 <정치학> 수업에 전면적으로 토론 방식을 도입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40명씩 두 분반으로 나누고, 각 반에서 2명씩 1팀을 이루어 2:2 토론을 10회 실시하는 겁니다. 한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된 정치학의 주요 주제들을 두고 토론을 하는 겁니다. 토론이 실제로 얼마나 잘 이루어질지, 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토론을 준비할지가 관건입니다. 학기말에 두 분반의 최고 토론팀 두 팀을 공개적으로 대결하게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40명씩 두 분반을 정확히 나누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학생들이 언제 봤다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려고 하고, 다른 교양 선택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없고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