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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호남 유권자의 시각에서 본 제3지대와 통합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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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유권자의 시각에서 본 제3지대와 통합

공진성 2019. 11. 23. 16:44

[2019년 11월 26일(화) 평화민주포럼 주최 정치현안 토론회 발제문]

냉전과 분단에 기댄 반공보수 세력의 권력 독점이 무너진 것은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권력 독점을 조금이라도 더 지속하기 위해 반공보수 세력은 민주화 세력의 일부를 흡수했지만 끝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민주화 세력은 삼당합당에 참여했던 JP와 그에 의해 대표되는 지역적 구 집권세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의 반공보수 세력은 비록 정권은 빼앗겼지만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는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의회에서도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에 힘입어 실제 유권자의 지지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며 과다 대표되었다. 시장주의 세력과 손잡은 반공보수 세력은 결국 정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함께 정권은 물론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도 잃게 되었다.

반공보수 세력의 권력 독점에 맞서 저항하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은 대동단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자독식의 선거제도 역시 후보단일화와 선거연대를 강제했다. 이 과정에서 진보/좌파 유권자도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도/보수 유권자도 자신이 처한 조건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지지 정당을 바꿔가며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분적 비례대표제와 충청과 호남에서의 지역적 투표의 영향으로 의회에서 명목상으로는 다당제 현상이 나타기도 했지만, 단순다수대표제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의 강력한 효과 탓에 실질적으로는 양당제가 관철되었다.

진보/좌파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이 다른 선택지(예컨대 정의당)가 있는 상황에서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의 승자독식 효과를 고려한 차선의 선택이었다면, 그리고 중도/보수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이 다른 선택지(예컨대 민주당 또는 새누리당)가 있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차선의 선택이었다면, 호남의 보수/우파 유권자의 선택은 사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강제된 것이었다. 민정당을 계승한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대부분의 호남 유권자에게는 차선은커녕 차악도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조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 호남 유권자의 선택은 이른바 대선에서의 90% 몰표로 나타났고, 총선에서의 민주당 독식으로 귀결되었다. 전국적 수준에서 이른바 야도였던 호남에 정작 야당이 없는 현상이 지속되었다. 호남의 진보/좌파 유권자의 의식된 불만이 자신이 실제로 지지하는 정당을 찍을 수 없는 현실, 즉 선거제도에 관한 것이었다면, 호남의 보수/우파 유권자의 의식되지 않은 불만은 단 하나의 선택만이 강요되는 현실, 즉 유효한 보수정당의 부재에 관한 것이었다.

강요된 선택의 결과가 대선에서의 승리이고 총선에서의 과반의석 확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선에서도 패배하고 의회에서도 제1당이 되지 못한다면, 더 나아가 지역주의 투표 행태를 보였다고 비난까지 받는다면, 호남의 유권자들, 특히 민주당을 이념적으로 강하게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들은 허탈하고 억울할 수밖에 없다.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고 두 차례의 집권 기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민주당 내에서 주류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른바 동교동계가 당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이른바 친노/친문세력이 당의 중심에 들어섰다. 민주당이 다시 야당이 된 기간 동안 당내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다. 이때 호남의 유권자, 그 가운데에서도 구 민주당 지지자들의 불만(“친문패권주의”)과 그동안 구조적 제약 속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유권자들의 불만(“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호남에서는 작대기를 꽂아도 당선된다는 오만한 생각”)이 동원되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 안철수 열풍은 바로 이 호남 유권자들의 누적된 불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호남의 중도/보수 유권자들은 비로소 또 하나의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될 뻔했다. 그러나 호남 외의 지역에서 여당인 새누리당과 양자대결 구도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새정치연합과 힘을 합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호남의 중도/보수 유권자들은 또 한 번 선택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민주당 내의 구 주류세력은 안철수를 끌어들여 당권을 장악하려고 했지만, 끝내 신 주류세력과의 경쟁에서 졌고, 새정치민주연합은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으로 나누어졌다.

총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만들어진 국민의당은 민주당이 야당인 상황에서 중도/보수 성향의 호남 유권자들의 누적된 불만을 동원해 호남지역 지역구 의석을 거의 독차지하는 데에 성공했고, 안철수를 앞세워 전국적으로도 중도/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많은 비례대표 지지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호남의 중도/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 물론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4년 총선에서도 이 유권자들에게는 열린우리당 외에 새천년민주당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호남 유권자는 열린우리당을 적극적으로 또는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그때는 열린우리당이 여당이었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에서 성공한 것은 세 가지 또는 네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결과였다. 평소에 강요된 선택에 불만을 품어왔던 보수 성향 유권자의 적극적 선택, 민주당이 야당인 상황에서 득실을 따진 중도 성향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 또는 민주당 구 주류세력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 그리고 안철수라는 강력한 대선후보의 존재, 이 세 가지 또는 네 가지 요소가 우연히 결합했기 때문에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요소들 가운데 지금도 존재하는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현재 호남지역에서의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나 민주당 정당 지지율을 봤을 때, 중도성향 유권자와 구 민주당 지지자의 상당 부분이 (스윙보터로서) 이번에는 민주당을 지지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찍었고, 2017년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를 찍었으며,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민주평화당이나 바른미래당을 찍은 중도/보수 성향의 유권자들만이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도 자유한국당도 아닌 3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3의 실체는 아직 없고, 그때의 안철수와 같은 주도적 인물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 구 주류세력이 다수를 차지하는 호남지역의 현역 국회의원들은 과거에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고 정권교체 뒤에 민주당 정권에서 정치 개혁과 대북 평화정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래서 자신을 여전히 진보와 개혁, 민주와 평화를 지향하는 세력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이들을 한때 지지했던 유권자들도 자신들을 그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이 유권자들의 상당수는 경제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문제에 대해 중도적이거나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과거 반공보수 세력의 권력 독점 속에서 그에 맞서는 야당에 반복해 지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진보적인 유권자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반공보수 세력은 정권도 잃었고 시민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도 잃었다. 그래서 탄핵에 찬성한 새누리당 의원들 가운데 일부가 탈당하여 개혁보수를 표방하며 바른정당을 만들었다. 바른정당은 탄핵에 반대한 세력이 결국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할 것이고, 자신들이 대안으로서 중도/보수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선택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일부 의원들은 다시 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갔고, 남은 의원들은 의회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의당과 합당했다. 그러나 자신을 진보/개혁 세력으로 이해하는 국민의당의 다수 의원들과 당원들은 바른정당과의 합당에 끝내 찬성하지 못하고 탈당하여 민주평화당을 만들었다.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이 합당하여 등장한 바른미래당은 지금까지도 이 당의 노선이 중도개혁인지 개혁보수인지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서너 가지 요소가 우연히 결합해 이루어진 2016년의 국민의당 돌풍은 두 가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국민의당 성공의 요인 가운데 적어도 일부가 그때 당선된 국회의원들 자신이라는 착각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의당을 선택한 호남 유권자들의 요구가 그저 민주당 외의 대안정당이라는 착각이다. 이 두 가지 착각이 결합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른바 3지대에서의 노선 갈등과 분열이 일어났다.

3지대에 속한 정치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대안정당의 존립 가능성이 민주당과의 차별성에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어떤 이는 오히려 민주당과의 친연성에 있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호남 지역에 국한된 시각을 버리고 전국적 차원에서 중도/보수 유권자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3지대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호남 지역에서는 과거에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선택했지만 이제 (민주당의 오른쪽에 위치한) 대안을 바라는 유권자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면, 호남 외의 지역에서는 또는 전국적 수준에서는 그것이 민주당도 자유한국당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중도 스윙보터들이 있는 곳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일부 지역에서는 시효가 다한 자유한국당을 대체할 대안적 보수정당을 바라는 실망한 보수 유권자가 있는 곳을 또한 의미한다.

그렇다면 3지대 통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에서 언급한 세 개의 상이한 의미의 제3지대들을 통합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호남 지역에서조차 분열되어 있는 이른바 호남 제3지대 세력들을 통합한다는 것인가? 첫 번째 의미의 제3지대 통합은 이루기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한국 정치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고, 현행 대통령제하에서 유효한 정당이 되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이 애초에 지향했던 바가 이것이었을 것이다. 일단은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사이에 위치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유한국당을 밀어내고 민주당과 양자대결을 벌일 수권정당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의 제3지대 통합은 그보다는 이루기 쉽겠지만, 지역정당이 허용되고 비례대표제가 전면적으로 확대되지 않는 한,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비례대표제의 전면적 확대는 분명히 소수 정당에 이롭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제하에서 그 효과는 분명히 제한적일 것이고, 어느 한 정당도 의회 안에서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히려 정치를 무능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행 대통령제와 선거법 하에서 첫 번째 의미의 제3지대 통합을 장기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자유한국당을 대체하는) 수권정당을 만드는 것이 정치발전에 더 유익할 수 있다.

대통령제와 단순다수대표제가 양당제, 즉 두 개의 거대 정당 간의 비타협적 대립을 낳았고, 그러므로 타협과 화합의 정치를 위해서는 비례대표제를 강화하여 다당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념적 대립의 시대에 대통령제와 단순다수대표제가 그런 비타협적 대립을 낳았던 것이지, 제도 자체가 대립을 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제와 단순다수대표제는 정당들의 이념적 극단화를 막고 중도수렴을 유발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복잡해진 현대 사회의 쟁점들을 포괄하는 데에도 유리할 수 있다.

냉전과 분단으로 인해 그동안 한국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은 왼쪽이 없고 오른쪽만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편적 시각에서 볼 때 중도적인 입장조차 좌파로 몰렸고, 우파적 입장이 중도로, 극우적 태도가 우파로 오해되었다. 이제 냉전 질서는 해체되었지만, 분단 체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냉전과 분단에 기대어 부당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그 권력을 손쉽게 정당화해왔던 반공보수 세력은 정권도 잃었고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도 잃었지만, 여전한 분단 현실에 기대어 수명을 연장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까? 그런 반공보수 세력에 맞서 민주화 세력을 지지했던, 그래서 자신을 진보 세력으로 이해해온 호남의 중도적 또는 보수적 유권자들이 과연 언제까지 민주화를 위해민주당만을 지지할까? 현재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한국 정치의 길고 지난한 정상화 과정의 일부이다.

지금 정당 재배열과 유권자 재배열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 과도기 상황에서 유권자도, 그들을 대표하려는 정치인들도 과거의 기억 탓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래서 정당과 유권자가 서로 제 짝을 찾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자들은 인적으로 단번에 교체될 수 있지만, 유권자는 결코 단번에 교체될 수 없다. 그저 출생과 사망의 자연적 속도에 맞춰 교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권자의 재배열에 맞춰 정당이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3지대 통합이, 첫 번째 의미이건 두 번째 의미이건 간에, 이루어지려면, 그 통합을 통해 유권자 집단의 의미 있는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제3지대에 있는 상이한 성격의 유권자 집단이 가진 각기 다른 기억들을 망각시킬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 기억들을 되살리는 기호와 상징, 인물들이 출마해서는 안 된다. 그 기억들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할, 그리고 오히려 새로운 기억을 창조할 다른 기호와 상징, 인물들이 등장해야 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기존의 정치인들은 각자의 당선을 위해 오히려 유권자들과 자신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럴수록 이른바 3지대 통합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3지대 통합을 위해 밀알이 되겠다거나 백의종군하겠다면서 계속해서 정치와 선거의 무대에 등장하여 유권자의 옛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는 제3지대 통합과 선거에서의 승리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3지대에 있는 유권자들에게 선택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현재 제3지대에 있는 유권자들의 다양한 사연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기존의 인물들이 전격적으로 물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현재의 인물들이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하여 호남 지역 내에서라도 민주당과의 양자대결 구도를 형성하기 위해 또는 정당기호 3번을 얻어 비례대표 지지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제3지대 소통합을 추진한다면,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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