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려워
[사설] 알바생이 될 것인가 노동자가 될 것인가 본문
'아르바이트'는 기만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노동'이라는 그 말의 본래 뜻을 감추면서 마치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인다. 과거에 아르바이트는 대학생의 과외교습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사교육의 원조인 대학생 과외가 한때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업으로 삼고 큰돈을 벌면서도 소득을 신고하지 않는 탈세자가 늘어난 것이다. 정부는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를 금지했지만, 대학생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몰래바이트'를 계속 했다.
당시에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은 노동자가 '일'을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결핍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름을, 더 나아가서 우월함을 의미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행여 가난해서 할지라도, 땀 흘리는 노동과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일종의 사례였다. 자식을 가르쳐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부모가 선생님께 드리는 것이었지 결코 노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세무서에 신고할 필요도 못 느꼈다. '아르바이트'는 공부를 잘 하는 대학생의 '고귀한 봉사활동'이었지, 결코 공부 못 한 노동자의 고된 노동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는 강자의 것이었다.
대학생의 수가 많아진 오늘날, 여전히 공부 잘 하는 일부 대학생은 과외교습을 하겠지만, 남을 가르칠 처지에 있지 않은 다수의 대학생은 다른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제 '아르바이트'는 대학생이 부업으로 일하는 것을 주로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생 수가 늘고 고등학생과 미취업의 또는 실직한 어른들까지 아르바이트에 뛰어들면서 일자리와 보수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었다. 오늘날 아르바이트는 결핍을 의미한다.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이 단기간에 낮은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이다. 오늘날 '아르바이트'는 약자의 것이다.
'아르바이트'라는 말에서 오늘날 고상한 의미는 사라졌지만, 노동을 노동으로 부르지 않는 과거의 기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 노동이 그 자체로 인식되지 못 하고 마치 저급하고 부정적인 것처럼 간주될 때, 사람들은 노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고 한다. 노동을 천시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근로'와 '아르바이트'라는 기만적인 표현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어떤 이름을 쓰더라도 노동이라는 객관적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성(섹스)을 객관적 현실로서 가르치지 않고 금기시하거나 신비화하는 것이 오히려 성 문제를 낳듯이, 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풍토가 오히려 노동 문제를 낳는다.
교원노조가 처음 생겼을 때 교사가 왜 노동자냐고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강자에겐 그 이름이 그저 부끄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약자에겐 그 이름이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의 표시이다. 부끄럽다고 그 이름을 거부하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법은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정하고 있고 각종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법의 보호를 받으려면 자신이 노동자가 되는 것을, 자신이 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계약서를 쓰는 것을, 소득을 신고하는 것을, 세금을 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학생이라는 쓸데없는 신분 의식과 아르바이트라는 기만적인 명칭을 버리고 노동자가 되어야 정당한 노동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노동자는 따로 있지 않다. 노동하는 사람이 바로 노동자이다.
※ 이 글은 2012년 11월 5일자 <조대신문> 사설로 실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