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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좋은 서평'과 좋은 '나쁜 서평'

공진성 2012. 2. 29. 12:20
아래 발췌한 글들은 프레시안에 실린 문화평론가 최수태의 글이다. 200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글도 좋고 생각도 깊다. 엄기호 이후로 글쟁이를 발견한 괜찮은 수확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729120448&Section=04



'좋은 서평'을 쓰는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책의 내용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소설이면 줄거리를 요약하고, 비소설이면 핵심적인 논증이나 강조되는 문장과 논리 구조 등을 추려낸다. 그런 것들을 최대한 맛깔나게 옮겨놓은 후, 필요하다면 독자로서 아쉬운 점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 등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일반적인 서평은 대체로 이런 공식 하에 작성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소개될 수 있는 책으로만 가득 차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떤 책들은 소개되어야 하지만, 어떤 책들은 소개되면서 또 비판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책들은 앞서 말한 '좋은 서평'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하지만 두 번째의 책들은?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혹은 특정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비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두 편의 서평만으로 간단히 매도되어서는 안 되는 그런 책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편의상 후자에 속하는 서평을 대조적인 차원에서 '나쁜 서평'이라고 해보자. '나쁜 서평'은 '좋은 서평'과 같은 방식으로는 쓰일 수 없다. 왜냐하면 비평을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주어진 지면 안에서 책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한 후 한 두 마디 첨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쁜 '좋은 서평'일 뿐, 좋은 '나쁜 서평'은 되지 못한다. '나쁜 서평'은 대상이 되는 책에 대해 비판적이기에, '좋은 서평'보다 훨씬 더 그 책의 본질에 다가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맥락이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다. 오늘은 이런 이슈가 뜨고 내일은 이런 화제가 묻혀버린다. 기자들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보고 기사를 쓴다. 그 기사를 읽는 누리꾼들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이렇다'고 자신들의 경향성을 재확인한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이슈를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검색을 이슈화한다. 그 어떤 논쟁과 사회적 담론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3시간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사회적 담론의 맥락은 여자 아이돌의 하의와 함께 아찔하게 실종되어버린다.

그래서 서평이 중요하다. 특히 '나쁜 서평'을 잘 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좋은 '나쁜 서평'은 잘 쓰인 '좋은 서평'과 마찬가지로, 결국 독자들이 책을 읽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쁜 서평'은 서평자 스스로의 개인적 시각과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그 책과의 대립각을 잃지 않는다.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나쁜 서평'은 모든 맥락이 0과 1로 분해되어 인터넷에 흩뿌려지고 있는 지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담론 형성의 방식이다.

지금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는 영화 평론이 주로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기껏해야 다운로드 받은 영화를 두고 '스포일링' 당하기 싫다며 20자 평을 제외한 그 어떤 해설도 읽지 않으려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보다 전에는 이른바 사회과학의 시대가 있었다고 하나, 그것이 어떤 형태였을지 현재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도저히 실감하지 못하겠다. 그 시절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맥락마저도 지금의 내게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잘 편집되고 제본된 한 권의 책보다 단단한 것은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서평은 글을 쓰는 이가 글을 읽는 이와 최소한의 공통된 맥락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분야다. 독자가 그 책을 읽었거나 읽게끔 한다면, 바로 그 한 권의 책을 통해 그와 나는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언어를 담는 그릇인데, 서평도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아무리 짧게 요약하고 핵심만을 추려낸다고 해도 서평을 읽는 경험은 책을 읽는 것에 비교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대부분의 서평자들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책을 읽고 표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서평은 어쨌건 논의의 대상이 되는 책에 대해 종속적이며, 부수적이고, 책의 내용을 전부 전달하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좋은 서평'을 쓰고자 할 뿐이라면 이와 같은 제약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좋은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 짧은 서평에 다 담기지 못한 다른 내용들을 궁금해할 것이고, 그래서 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할 것이며, 서평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나쁜 서평'을 쓸 때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특히 신간을 다룬다면, 서평자는 독자가 읽지도 않은 책을 독자에게 소개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자신의 논리마저 납득시켜야 한다. 스스로의 서평이 일방적인 매도 혹은 왜곡이 되지 않도록, 자신이 허수아비 논증을 하는 누군가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역동적인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서평을 쓰기 위해 노력해왔다. 단순히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책의 싸움을 보여주고 어느 한쪽의 편에 서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진정으로 개입(engagement)하게 만드는 서평이 가능한지, 그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지가 나의 관심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때로는 만족스럽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서평자는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이다. 그리고 '좋은 서평'을 쓰는 사람과 달리, '나쁜 서평'을 쓰는 사람은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한 후 그 급소를 찔러야만 한다.

문제는 그 코끼리를 설명하는 형식이다. '좋은 서평'과는 달리, '나쁜 서평'은 긴 분량을 할애하여 책의 내용 전체를 그려낼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책 전체의 내용을 소개해버리면 책 전체를 반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거대하고 복잡한 지적·언어적 구조물이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논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 한 권,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하다. 적어도 하나의 서평에서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그래서 '나쁜 서평'은 곧 그 책을 최대한 꼼꼼하게 읽고 '급소'를 찾는 작업과 직결된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로 그 논점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책의 주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어떤 문장, 단어, 문단, 혹은 논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코끼리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코끼리는 긴 코를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마는 큰 입을 가지고 있고, 기린은 목이 길다. 물론 그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지만, 그 도약을 하지 못한다면 나의 혹은 당신의 서평을 통해 독자와 저자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내가 저자와 만나 대화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모든 과정을 연속극처럼 보여줄 수는 없다. 일종의 '영화적 순간'을 연출해 내느냐 아니냐에서 좋은 '나쁜 서평'과 나쁜 '좋은 서평'이 나누어진다.



최수태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데, 한 가지 이견을 가지고 있는 점은 이것이다. 오늘날 매체 환경 속에서 그런 '개입 의욕'의 지속 시간이 너무도 짧다는 것이다. 이런 서평이 게재되는 공간 역시 인터넷인 상황에서, 온라인 서점을 통해 책 주문을 하도록 하는 데까지는 지속되어도, 그 책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읽게 만드는 데까지는 그런 '개입 의욕'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전자책의 보급이 이 문제를 해결해줄까? 다른 매체 환경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도서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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