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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 그렇다. 여행을 하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행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부도 기본적으로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정치 역시 그렇다. 과거에 정치는 경제적 필요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정치는 통치를 의미했다. 타인을 물리적 힘으로 제압한 사람들이 보호를 대가로 경제적 생산물을 수취함으로써 스스로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정치(통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왕정이나 귀족정이 그렇게 운영되었다. 그러나 고대의 민주정도 사실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노예제 덕분에 각자의 가정에서 왕이 된 사람들이 모여 다만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던 것이다..
선거법 개정에 대한 의견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언론의 요청도 있지만, 국회의 요청도 있다. 작년 11월에도 그런 토론회가 지역에서 열렸고, 참석해서 내 생각을 말했다. 학자로서 나는 특정 선거 제도의 효과, 장단점, 도입 가능성, 목적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에 대한 의견을 말할 뿐, 어떤 제도를 특별히 더 선호해 도입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자에게 의견을 묻는 사람은 그런 영양가 없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나 ‘우리’에게 유리한 제도를 옳거나 좋은 제도로 포장해 권위 있는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바란다. 예의 토론회에서 나는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주최 측의 의도에 따라 마치 그런 것처럼 보도되었다. 비례성과 대표성의 강화가 개혁의 방향이어야 ..
‘네다꼰’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직접 듣거나 써본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글로 배운 말이다. ‘네, 다음 꼰대!’의 줄임말인데, 누가 일장 훈계를 늘어놓으면 그것을 세상 흔한 꼰대질로 요약하며 거부할 때 사용하는 인터넷 언어라고 한다. ‘다음 소희’라는 영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르게 이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훈계질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수많은 ‘꼰대’들, 그리고 한 명의 꼰대를 물리치면 또 다른 꼰대가 나타나듯이, 수많은 ‘소희’들이 줄을 서 있고, 한 명의 소희가 사라지면 다음 소희가 그 자리에 들어서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며칠 전, 그 영화를 봤다. 영화는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생인 소희가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면서 겪는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2017년 전주에서..
추운 겨울을 집에서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다. 그런데 이 행운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가 없다. 겨울철을 따뜻하게 보내게 해주는 가스보일러도 물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 가뭄 탓에 조만간 호남 지역에 수도 공급이 제한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추운 겨울이라도 지난 후에 수도 공급이 제한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 전에 제한되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인들이 많이 사는 독일의 상황이 걱정된다. 그곳은 물이 아니라 가스가 문제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공급이 줄어서 안 그래도 춥게 사는 독일 사람들이 올겨울에는 평소보다 더 춥게 살아야 한다고 한다. 필요한 가스의 80퍼센트 정도를 확보했다느니, 그래서 실내 온도 상한..
요즘 뒤늦게 드라마 하나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2012년 방영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작년까지 무려 일곱 개의 시즌을 제작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일본에서 얻었다. 주인공은 천재적 수술 실력을 갖춘 외과 의사이다. 그는 대학병원에 정규직으로 채용된 의사가 아니라, 특별한 계약을 맺고 일시적으로 자신의 의료 기술을 제공하는 프리랜서 의사이다. 어려운 수술을 성공시키고 나면 매니저가 나타나 거액의 요금을 병원장에게 청구한다. 이 프리랜서 의사가 병원과 계약을 체결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하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병원에서 의사들이 흔히 하는 온갖 잡일을 자신은 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그렇게 분명히 선언했지만, 주위의 의사들은 그들이 하는 온갖 일을 주인공에게도 하라고 계속 요구한다. 그때마다 ..
지난 9월 함부르크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개인적으로 날 찾아온 한두 명의 손님이 아니라, 또래 학생을 만나 교류하고 싶다고 광주를 찾아온 열일곱 명의 독일인 손님이었다. 어쩌다가 올해 4월 처음 연락을 받고 두 도시의 학생들을 서로 만날 수 있게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사실 그때는 크게 걱정을 안 했다. 학생으로 가득한 대학에서 외국에서 온 또래를 만나보고 싶어 할 학생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어떻게 선발할지가 고민이었다. 방문 시기를 결정할 때부터 조금씩 걱정스러운 요소들이 드러났다. 우리의 방학 때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방문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방학 때여야 학생들에게 시간 여유가 있어서 쉽게 참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오는 쪽에서 그때는 어렵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
정치학의 여러 세부 전공 가운데 사실 내 전공은 정치사상이다. ‘사실’이라는 말을 굳이 붙인 이유는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방송과 신문을 통해 한국정치에 대해 발언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혹시 사람들이 내 전공을 한국정치로 오해할까 봐서이다. 한국정치나 비교정치를 전공한 학자가 지방이나 중앙의 정치 문제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지만 지방의 현실은 그런 전문적 분업을 추구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아서 그저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명분만으로 온갖 이야기를 다 하고 있다. 정치사상이라는 내 전공 분야가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현실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그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정치사상은 현실 정치의 문제를 조금 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다루며, 특히 과거의 사람..
시평 쓰기가 너무 어렵다. 글쓰기 자체가 힘든 것도 있지만, 한국의 정치 상황이 너무 빨리 변해서 더 힘들다. ‘시평(時評)’인 만큼 시국에 맞춰 글을 써야 할 텐데, 생각이 좀 정리될 법하면 상황이 바뀌어서 애초의 소재가 이미 사람들 관심 밖에 있고, 새로운 관심사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 쓸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늘 이런 식이다. 부족한 내 지식과 순발력을 우선 탓해야 하겠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깊이 생각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 탓도 좀 하고 싶다. 지난 5주 동안 내 머릿속에 머물렀던 여러 주제 가운데 첫 번째는 추첨제였다. 광주 광산구의회의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의장 후보 선출에 합의하지 못해서 결국 ‘제비뽑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언..
선거가 끝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됐다. 작년 하반기에 시작된 각 당의 대선후보 경선부터 생각하면 거의 1년 동안 선거가 계속된 셈이다. 이제야 비로소 선거가 끝나나 싶었는데 새로운 선거가 다시 시작됐다. 민주당에서는 공식적으로 당대표 선거가 시작됐고, 국민의힘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당대표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큰 싸움이 끝나면 작은 싸움이 시작되고, 작은 싸움이 끝나면 다시 큰 싸움이 시작되는 패턴의 반복이다. 지난 지방선거가 대선의 연장전처럼 치러졌다고들 말한다. 지금 민주당의 당대표 선거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이 선거 역시 대선의 연장전처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선후보 경선의 연장전처럼 치러지는 것 같다. 후보가 이재명이었기 때문에 대선에서 졌다는 생각이나 이재명이었기 때문에 그..
이번 지방선거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선이 끝나고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 치러졌다. 온전한 지방자치가 아니기 때문에도 원래 중앙정치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치러지는 지방선거인데, 대선 직후에 치러진 지방선거여서 더욱 중앙정치의 강한 영향 속에서 치러졌다. (지방자치가 자체의 내부 논리에 따라 실시되기 위해서는 지역별로 다른 시기에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구조적 조건은 정권교체였다. 새로 출범한 중앙의 행정 권력에 줄을 대야만 지방이 한 푼이라도 예산을 더 따올 수 있고, 그래야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한 푼이라도 더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방의 주민들은 새로운 여당을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