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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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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정치

공진성 2023. 5. 8. 17:16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 그렇다. 여행을 하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행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부도 기본적으로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정치 역시 그렇다.

과거에 정치는 경제적 필요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정치는 통치를 의미했다. 타인을 물리적 힘으로 제압한 사람들이 보호를 대가로 경제적 생산물을 수취함으로써 스스로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정치(통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왕정이나 귀족정이 그렇게 운영되었다. 그러나 고대의 민주정도 사실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노예제 덕분에 각자의 가정에서 왕이 된 사람들이 모여 다만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통치에 참여하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19세기까지 유럽의 정치인들은 무보수명예직이었다. 그들은 보수를 바라지 않고 어디까지나 명예롭게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정치에 참여했지만, 그런 그들이 지닌 계급적 편향성을 마르크스는 비판했다. 그들의 정치적 결정이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무보수명예직인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유산계급의 편향을 무산계급의 참여를 통해 상쇄하기 위해서는 정치인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보수를 받는 직업정치인이 탄생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선거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당선까지의 불확실한 시간을 견디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장시간 일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누구 한 사람을 후원하지 않고서는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직업정치인이 되기는 어렵다. 지난 세기 노조와 정당이 한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민주화의 역사는 정치를 돈과 무관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역사이다. 소수의 지배는 필연적으로 부자의 지배였고, 그러므로 부()의 지배를 막는 것이 곧 민주화를 의미했다. 선거권자의 수를 늘리는 것도, 피선거권자의 연령을 낮추는 것도 모두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여겨졌다. 선거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선거공영제 역시 돈과 정치를 무관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제도였다. 그러나 여전히 선거와 선거 사이의 기간에 이루어지는 정치활동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문제는 남는다. 모두가 안철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직업정치인들이 춘궁기를 버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불법적인 방법도 있고, 합법적인 방법도 있다. 출판기념회나 후원회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이 후원하는 사람에게 정치인의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의 힘을 상쇄하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도와야 하는데 돈 벌기에 바쁜 사람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유권자들 간에는 금력 차이가 생기고, 그 결과 금권 정치가 크거나 작게 발생한다. 하물며 정치인이 불법 자금을 몰래 수수하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직업정치인이 뒷돈이나 앞돈을 받는 것은 부자들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과연 얼마나 다를까?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가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성토의 목소리가 크다. 그러나 과연 그 목소리가 정치와 돈의 분리라는 민주적 이상에 입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드러난 반칙과 부정에 대한 비판인지 모르겠다. 반칙과 부정이 없었으면, 돈 봉투가 오가지 않았으면, 우리의 정치는 돈과 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빈부와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가 오갔다는 의혹은 규명되어야 하고, 관련자는 정치적ㆍ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앞으로 돈 봉투를 주고받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 정치적 결정이 부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더 근본적인 개혁에 힘써야 한다. 여야 할 것 없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이라면 의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것이 국민이 정치인에게 세비를 지급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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