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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언제나 문제는 달리 파악되고 대책도 달리 제시되지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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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문제는 달리 파악되고 대책도 달리 제시되지만

공진성 2022. 9. 26. 13:31

정치학의 여러 세부 전공 가운데 사실 내 전공은 정치사상이다. ‘사실이라는 말을 굳이 붙인 이유는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방송과 신문을 통해 한국정치에 대해 발언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혹시 사람들이 내 전공을 한국정치로 오해할까 봐서이다. 한국정치나 비교정치를 전공한 학자가 지방이나 중앙의 정치 문제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지만 지방의 현실은 그런 전문적 분업을 추구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아서 그저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명분만으로 온갖 이야기를 다 하고 있다.

정치사상이라는 내 전공 분야가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현실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그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정치사상은 현실 정치의 문제를 조금 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다루며, 특히 과거의 사람들이 유사한 문제를 다룬 방식과 비교하여 그 지적 계보를 추적한다. 그 점에서 철학과도 비슷하고 역사학과도 비슷하지만, 철학과도 다르고 역사학과도 다른 점은 사상가가 정치적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에 지적으로 대응하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한때 정치사상사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홉스, 칸트, 헤겔 같은 지적 거인들이 시대를 초월해 나누는 대화처럼 여겨졌다. 그들 역시 현실 정치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고도의 추상성을 가지고 다루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은 시대와 장소를 떠나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처럼 이해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이론을 보편적 주장처럼 다루는 일이 지나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을 이용해 현재의 천박한 정치 현실을 비판하며 바꾸려고 하거나 그 반대로 현재의 전체주의 체제가 등장한 원인이 플라톤의 정치사상에 있다며 비판하는 것이다.

몰역사적 정치사상 연구에 반대해 정치사상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흐름도 등장했다. 제아무리 지적인 거인이더라도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구체적인 사람들을 청중과 독자로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글을 쓴 이상, 후대인이 그런 사상가의 말과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시대와 구체적 발언의 맥락, 언어의 뜻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지만, 그런 당연한 얘기가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물론 여전히 종교 경전을 그런 식으로 독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듯이 정치사상의 고전을 그런 식으로 독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정치사상 고전 텍스트는 결코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텍스트를 대할 때 비로소 고전이 담고 있는 진리가 온전히 독자에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학기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과 함께 한국 현대정치사상사를 공부한다. 김구와 이승만부터 리영희, 박현채, 문익환, 장일순까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정치적 인물들의 사상을 위에서 언급한 정치사상 연구의 방법과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사상을 어떤 사상가가 자신이 속한 정치공동체가 직면한 도전에 지적으로 대응한 결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정치공동체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인지는 지적 경쟁 속에서 늘 다르게 인식되고, 그래서 또한 늘 다른 처방이 내려진다. 어느 처방이 옳은 것인지는 그 자체로 결정되지 않고, 사상가가 가진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나 정책결정권자에 대한 영향력에 의해 결정된다. 당시의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해서 꼭 틀린 처방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서보관소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던 그 처방이 후대에 다른 사상가에 의해 재조명되어 현실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전-응전 접근법은 정치사상의 역사를 이렇게 역동적인 사상정치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한국 현대사 속의 지식인들이 당대의 정치적 도전에 맞서기 위해 어떻게 동서고금의 정치사상을 지적 자원으로 활용하며 경쟁했는지를 살펴보면, 지금 우리의 정치적 도전 과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에 맞서야 할지가 조금은 분명해질까?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한국 현대정치사는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도 사상가는 그런 무모한 지적 싸움에 뛰어든다. 그것이 자기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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