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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단순화는 필요하지만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면 곤란해 본문

논문 에세이 번역 책

단순화는 필요하지만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면 곤란해

공진성 2023. 1. 26. 10:50

추운 겨울을 집에서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다. 그런데 이 행운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가 없다. 겨울철을 따뜻하게 보내게 해주는 가스보일러도 물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 가뭄 탓에 조만간 호남 지역에 수도 공급이 제한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추운 겨울이라도 지난 후에 수도 공급이 제한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 전에 제한되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인들이 많이 사는 독일의 상황이 걱정된다. 그곳은 물이 아니라 가스가 문제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공급이 줄어서 안 그래도 춥게 사는 독일 사람들이 올겨울에는 평소보다 더 춥게 살아야 한다고 한다. 필요한 가스의 80퍼센트 정도를 확보했다느니, 그래서 실내 온도 상한을 몇 도로 더 낮췄다느니 하는 소식이 들려오면 괜히 나까지 더 추워진다.

문재인 정권에서도 탈원전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자 이제 다른 맥락에서 탈원전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 정권이 탈원전 정책을 불법적으로 추진했다는 감사원발 의혹 제기와 뒤이어 벌어진 검찰 수사가 하나의 주제라면, 다른 하나의 주제는 애초에 탈원전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독일의 에너지 위기는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탈원전 정책이 독일을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그것이 결국 독일의 전략적 취약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이 애초에 원자력 발전소를 2022년까지 폐쇄하고 재생이 가능한 에너지원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기로 한 것이 과연 그릇된 판단이었는지는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때 인류는 화석연료 고갈을 걱정했다. 그러나 지금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기후변화를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대한민국에서 한때 우리는 에너지 절약을 외쳤지만, 지금 우리는 기름이 나오더라도 다른 친환경적 에너지원을 찾아야 한다. 원자력 발전이 상대적으로 친환경적일지 몰라도 폐기물 등의 처리 문제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로 후손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분명하고, 그런 의미에서나 또 다른 의미에서나 위험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므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되 그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기술의 발전 정도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돌발 변수를 고려해 정책을 유연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탈원전도 해야 하지만 일시적 탈-탈원전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안은 쉽게 이것 아니면 저것, 전부 아니면 전무 식으로, 그래서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한 사람이 옳으면 다른 사람은 틀리고, 내가 옳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이 틀려야만 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사안은 복잡하고 그 복잡한 사안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사고가 유연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쉽게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

평범한 생활인은 그럴 수밖에 없다. 사안을 복잡하게 생각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은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해 하나의 선택지를 제시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런 대중의 선택이 궁극적으로 합리성을 가지려면 먼저 전문가들이 사안의 복잡성을 제대로 파악한 다음, 가능한 선택지들과 그에 따르는 기회와 위험을 정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정치인들이 그렇게 제시된 선택지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책임감 있게 결정해 대중에게 단일한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선택지들이 서로 경합을 벌이고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이 바로 선거이고 정당정치이다.

이 정당정치가 더는 시민의 선택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조차 때로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사안을 단순화하고 심지어 대중을 선동하며, 정치인들도 자기 선택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그저 대중의 눈치를 보면서 우물쭈물하다가 상황에 쫓겨 무책임하게 결정하기 때문이다. 정당정치가 다시 제구실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혁도 필요하지만, 전문가들의 자성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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