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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하다(3) 책 사이에는 지식이, 빵 사이에는 고기가

공진성 2014. 5. 19. 13:55

책 사이에는 지식이, 빵 사이에는 고기가

 

파리 동남쪽에는 매우 특이한 모양의 거대한 도서관이 하나 있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어떤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 주인은 바로 프랑수아 미테랑이라는 프랑스 최장수 대통령입니다. 그는 (지금은 5년으로 바뀌었지만) 임기 7년의 대통령직을 연임하여 14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일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임기 때 세워진 도서관이 바로 프랑수아 미테랑 국립도서관입니다. 독일 베를린의 국립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이 도서관도 이용을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합니다. 참고문헌실을 하루 이용하기 위해 3.5유로, 우리 돈으로 5천 원 가량을 내야 합니다. 제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아주 운이 좋게도 주말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어서 토요일 아침에 길을 나섰습니다. 파리의 남쪽 국제대학기숙사촌이 있는 동네에서 출발하여 차이나타운이 있는 톨비악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꺾어 센느강을 향했습니다. 그러자 널찍널찍한 길과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무언가 파리답지 않아 보이는 공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한 편에 네 개의 거대한 ‘L()’자 모양의 유리 건물이 서 있었습니다.

 

 

 

자크 아탈리가 쓴 <미테랑 평전>에는 이 도서관이 세워지게 된 배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19883, 미테랑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나갈 무렵 그의 특별보좌관 아탈리가 대통령에게 다음 임기에 추진할 어떤 대규모 계획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때까지 재출마 의사도, 또 하나의 대규모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대통령에게 아탈리는 다시 출마하면 두 번째 임기에는 현대적 이미지를 부여하자고 제안합니다. 파리 동남쪽에 대학도서관을 설립하고 그곳을 당시로서는 아직 낯선 개념인 인터넷 기반의 전자도서관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미테랑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하고, 1988714일 이 도서관의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도서관, 모든 분야의 지식을 포괄하고 이 지식을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도서관을 짓는 계획이었습니다.

 

 

 

애초에 이 계획을 제안한 아탈리는 새 대학도서관 건설을 위해 15억 프랑의 예산을 마련하고 3분의 2를 건물과 장서에, 나머지 3분의 1을 전산망 구축에 할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국립도서관의 별관 신축 계획으로 바뀌면서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애초의 계획과 다르게 전통적 서가와 열람실을 갖춘 대규모의 국립도서관 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테랑 대통령의 임기 만료 직전에 완공된 이 도서관 건설에 최종적으로 애초 예산의 여섯 배가 넘는 15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2조 원이 들었고, 건물을 짓는 데에만 그 95%가 소요되었다고 하니, 보이지 않는 최첨단기술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탈리의 아쉬움과 무관하게, 그 건물이 얼마나 대단할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도서관을 설계한 사람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캠퍼스복합단지(ECC)를 설계한 도미니크 페로입니다. 이 두 건물에서 건축가의 일관된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하공간을 지하 같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ECC관이 마치 모세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듯이 가운데 통로를 두고 양쪽으로 지하의 건물이 갈라져 있어서 지하에서도 지상에서처럼 빛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듯이, 미테랑 도서관도 지하에 있지만 건물 한 가운데에 거대한 정원이 있어서 지하에 있는 열람실에까지 빛이 가닿게 되어 있습니다. 6만 제곱미터 넓이의 지하 건물 한 가운데 12천 제곱미터 넓이의 정원이 들어 있는 모양입니다. 지상에는 그 넓은 공간의 네 모퉁이에 79미터 높이의 유리 건물 네 동이 들어서 있습니다. 장서 보관소인 이 건물들은 펼쳐진 책 모양을 하고 있고, 햇볕을 막기 위해 유리벽 안에 세로로 설치된 나무틀 때문에 책꽂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도서관이 위치해 있는 파리 동남부 센느강 주변 지역은 제가 이전까지 보아온 파리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시내에서 접한 파리는 아주 중세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전통적이었는데, 이곳은 지극히 현대적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프랑스가 이탈리아와 유사하게 낙농국가이고 과거의 영광을 팔아 먹고 사는 그리 부유하지 않은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파리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이긴 하지만 부유한 최첨단의 도시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는 프랑스와 파리의 다른 면을 보았습니다. 파리의 현대적인 면을 보았고, 프랑스의 부와 국력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돈밖에 없는 천박한 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은 프랑스의 지적인 부, 문화적인 부였고, 거기에 기꺼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국민적 동의의 힘이었습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짐을 싸서 도서관을 빠져나왔습니다. ‘연기를 뿜는 굴뚝(Le Camion qui fume)’ 앞에 줄을 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이 햄버거 가게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어쩌면 미테랑 도서관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움직이는햄버거 가게는 다음에 프랑스 요리 이야기에서 등장하게 될 르 꼬르동 블루출신의 한국인 셰프가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도서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토요일에 때맞춰 이 가게가 근처에서 오후 일곱 시부터 햄버거를 판다고 하니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가게는 트럭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트럭을 세워놓고 연기를 피우며햄버거를 만들어 파는 트럭입니다. 홈페이지에는 두 대의 트럭이 각각 어느 요일에 어디에서 몇 시부터 햄버거를 파는지 공지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에 요리를 배우러 온 미국인 여성 크리스틴 프레데릭이 201111월에 프랑스인들이 우습게 보는 미국음식 햄버거를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결심하고서 이 가게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후 한 해 동안 이 가게는 파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프레데릭은 2012년 말 어느 미식 가이드가 선정한 올해의 뛰어난 셰프 9가운데 한 명이 되었으며, 이 가게는 프랑스의 레스토랑 네트워크가 주최한 ‘2012년 가장 혁신적인 레스토랑선발대회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삼사십 분 전에 가면 될 거라고 생각한 저는 그날 무려 두 시간 가량을 기다린 후에야 햄버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줄이 이미 한창 길게 늘어서 있었던 것입니다. 햄버거는 물론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맛있어서인지, 아니면 오래 기다려서 배고팠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주를 기다렸다가 토요일에 다시 햄버거를, 아니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한 주 전에 먹은 햄버거 생각에 차분히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한 시간도 전에 나갔습니다. 트럭 주위를 눈치 보며 배회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다행히 아직 줄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당당히 트럭 앞에 섰고, 이후 한 시간 동안 각종 재료를 다듬고 지지고 볶는 소리와 냄새에 시달렸습니다.

 

 

 

한 대의 트럭에서는 젊은 남자 대여섯 명이 함께 일했습니다. 주문을 받는 사람, 감자를 튀기는 사람, 패티를 굽는 사람, 야채를 썰고 볶는 사람, 이 모든 것을 조합하여 햄버거를 만드는 사람 등으로 역할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모든 재료는 신선했고 즉석에서 조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데에 몇 시간이 걸렸고, 주문을 받고 요리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만 음료수 가격이 달랐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 트럭은 미테랑 도서관 옆의 ‘MK2’ 영화관 앞에서 장사를 하는데 자릿세 대신에 이 영화관 매점의 음료수를 가져다가 다른 곳에서 자신들이 직접 팔 때보다 1유로 더 비싼 가격으로 대신 팔아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관은 음료수 판매가 늘어서 좋고, 햄버거 가게는 (음료수 판매마진을 포기하는 대신) 자리를 빌릴 수 있어서 좋으니 나름의 상생 방법이었습니다.

 

 

 

맛은 어땠냐고요? 한 개에 우리 돈으로 1만 원이 넘는 햄버거가 어찌 맛없을 수 있겠습니까. 육즙은 살아 있었고, 나머지 재료들도 신선했으며, 빵은 햄버거의 맛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고소했습니다. 다만, 감자튀김이 얇은 것이 흠이었다고 할까요. 이런 햄버거 트럭이 우리 학교에 들어오는 상상을 해봅니다. 음료수는 매점에서 공급받아 대신 판매하는 조건으로 수제 햄버거 판매를 허락하는 겁니다. 교내 식당을 운영하는 업체들이 반대할까요? 그러지 않더라도 어쩌면 한두 시간씩 줄을 설 물리적심리적 여유가 없는 손님들 때문에 망하거나, 급한 고객의 사정에 맞춰 다시 흔한 패스트푸드 가게로 전락하여 결국 외면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대한 도서관을 지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고 소통케 하는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으려는 대통령을 만나기가 아직 무리이듯이 저런 고급 햄버거를 한두 시간씩 줄을 서서 먹을 여유를 가지는 것도 아직은 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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