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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객관식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는가 본문

대학생활

왜 객관식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는가

공진성 2011. 3. 6. 16:13

김덕영, <입시 공화국의 종말>, 인물과사상사, 2007년.


"객관식 시험은 유아기 단계의 정신적 능력에 해당한다. 유아기에 인간은 이 세상에 '정답'이 있고 '오답'이 있다는 식으로 주변의 환경과 사물을 지각하면서 성장한다. 이를테면 유아는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배운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은커녕 생존하기조차 힘들다. 그는 세상의 '정답'과 '오답'을 객관적인 외부 존재로부터 배운다. 정답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엄마이다. 어린아이들은 남의 역할을 잘 흉내 내는데, 이렇게 해서 세상의 '정답'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라며 서서히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주관적인 '세계상'을 정립하게 된다. 이른바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 그런데 한국 사회는 객관식 시험을 통해 개인이 유아기적 단계를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 언제나 외부에서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정답을 찾는, 외부 지향적이고 객체 지향적인 인간을 기르는 것이 한국의 교육과 시험이 추구하는 이념이자 가치이다."(272~273쪽)

"나 또는 우리, 즉 '정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은 너 또는 너희, 즉 '오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답'은 선한 것이요 '오답'은 악한 것이다. 둘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둘 사이에 접점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답'과 '오답'은 논의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찾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273쪽)

-> 대선이나 총선 시에 후보자 선택과 관련하여 한국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도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좋아하는 후보, 지지하는 후보, 또는 그들이 대표하는 정치적 노선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당선될 것 같은 후보, 집권가능성을 지닌 정당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론조사는 바로 이런 식의 정치 담론을 부추긴다. 경마식 보도를 통해 전국민이 그저 후보들 간의 순위다툼에만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든다. 승자독식의 단순다수대표제도 이런 현상을 거든다. 

"최소한의 근대성도 확보하지 못한 인간 유형"(273쪽)

"객관식 시험과 주관식 시험의 언어적 의미를 살펴보자. 객관식 시험은 말 그대로 '객이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객관식 시험의 반대말인 주관식 시험은 말 그대로 '주인이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 주인이 바라본다 함은 내가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주인으로서 내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주인 정신의 소유자이다. 이에 반해 객이 바라본다 함은 내가 아니라 남이 바라본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여기에서 남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그의 노예가 된다."(274쪽)

-> 주인의 권리 확보와 주인의 능력 확보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권리의 보장 없이 능력이 확보는 불가능하다. 아직 능력이 없으므로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지배를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권리의 보장은 능력 확보의 조건이자 결과이다. 시계열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구성적 관계 속의 두 계기이다.

"정답이 있는 객관식 시험은 복잡해지고 어려워질 수록 학생들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구속할 뿐이다. 정답을 찾는 길이 복잡해진다 해서 수험생의 사유가 정답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의미의 사고력, 곧 생각의 힘이란 정답이 없는 자유로운 곳에서 비로소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김상봉, <학벌사회>, 한길사, 2004년, 237쪽; 김덕영 275쪽에서 재인용)

"노예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에게 항의를 해서는 더더욱 아니 된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노동하는 것이 노예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유일한 책무이다."(276쪽)

-> '정치'는 본질적으로 자유인의 활동이다. '정치학'은 그런 활동에 대한 탐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학은 자유인의 학문일 수밖에 없고, 자유롭게 하는 학문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학 수업에서 객관식 시험은 지양되어야 한다. 시민을 기르지 않고, 신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정치학과' 대신에 '국민윤리학과'가 생겨난 것과도 관계된다.)

"약국, 슈퍼마켓, 드라이브인 영화관, 패스트푸드점 등 미국의 사소한 일상적 생활 세계를 나열한 무수한 단편적인 문장을 반복적으로 외우면서 회화를 익힐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기에 내포된 미국식 자본주의와 기업 이데올로기를 접하게 될 것이다."(280~281쪽)

-> 영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에는 특정 문화집단의 '생활세계'가 녹아들어 있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문화를 배우고, 그 문화가 지닌 헤게모니를 받아들이게 된다. 모어, 모국어 역시 그렇게 생각하면 철저히 지배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면 일체의 언어를 배우기를 거부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언어 속에 숨은 권력의 문제를 간파하는 것이지, 언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 강정인, <나는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에 실린 미국인 영어 강사의 글 참조.

"굳이 정답을 찾는다면 수험생의 주관적 관점, 논증방식과 절차, 그리고 사유의 참신성과 독창성 등등이 될 것이다. ...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는 과정 그 자체가 정답이다."(284쪽)

"시험에서도 고등학교와 대학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고 전도된 모습을 보여준다. 서울대는 2008학년도 논술 고사의 시험 시간을 5시간으로 결정했다. 문항은 인문계가 3개, 자연계가 4개를 각각 출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른 대학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술 고사를 거쳐서 들어간 대학에서 치르는 시험은 어떠한가? 대략 한 시간 정도에 걸쳐 2~3문제를 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도 말이 주관식 서술형이지 강의 시간에 배운 것을 착실히 암기해 충실히 답안을 채우는 방식이 주종을 이룬다. 결국 변형된 객관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험으로 학생들을 측정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논술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182~183쪽)

"내가 보기에 표절의 근본적인 원인은 교육과 시험에서 찾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교육과 시험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표절자'로 만든다. / 한국의 교육은 '나', 즉 자아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유와 행위를 가르치지 않고, '나'와 '너', 즉 타자를 구분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 도덕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도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구분을 교육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최선의 것은 누군가에 의해 - 책을 통해서든 참고서를 통해서든 아니면 교사와 학원 강사를 통해서든 - 외부로부터 주어진 무수한 지식과 정보를 반복적으로 외움으로써, 즉 남이 부여한 것을 완전히 체득함으로써 나와 남, 그리고 나의 것과 남의 것을 완전한 하나로 만드는 일이다. 자아가 타자로부터 조금이라도 분리되면 그만큼 시험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 논의한 '오답 노트'는 자아가 타자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려는 몸부림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209~210쪽)

-> 시험 성적이 나오면 교수를 찾아오는 학생이 있다. 자신의 답안에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오답'을 찾는 것이다. 정확히 무엇이 '오답'인지를 얘기해주지 않는 교수에게 그 학생은 답답함을 느낀다. 12년간의 초중등 교육에서 얻은 습관을 쉽게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외부로부터 주어진 남의 지식을 반복해서 외우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험에서 정답을 고르는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 이는 결국 남의 것을 베끼도록 가르치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것도 가능하면 많이, 그리고 아주 충실하게. 잘못 베기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그에 대한 대가는 대학 입시에서의 나쁜 결과로 주어진다. 남의 지식을 잘 베끼는 사람이 좋은 성적으로 거두는 교육적 풍토에서는 내가 누구의 것을 베꼈는지 밝힐 이유가 전혀 없다."(213~214쪽)

"주입식 교육은 토론식 수업과 논술식 수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와 남을 구분하고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며, 바로 그 바탕 위에서 토론하고 논쟁하며 남의 것은 나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논증하거나 다른 사람의 견해와 입장을 논박하는 자료로 사용하는 능력을 배양시켜야 한다."(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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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의 기발한 시험답안 - 창조적 사고의 다양성


덴마크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 시험 답안을 두고 교수와 학생간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기압계로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묻는 문제에 학생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기압계에 줄을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
린 뒤 그 길이를 재면 된다."고 답을 한 것이죠.


중재를 맡은 다른 교수는 그 학생에게 "6분을 줄 테니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을 써내라."고 했습니다. 학생이 새로 써낸 답은, 기압계를 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아래로 떨어뜨린 후 낙하시간을 재고 '낙하거리〓1/2(중력가속도×낙하시간의 제곱)' 공식에 따라 높이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0점을 주장한 교수는 이 답에는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중재역 교수는 학생에게 또 다른 답을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옥상에서 바닥에 닿도록 긴 줄에 기압계를 추처럼 매달아 흔들어 그 진동주기를 통해 건물 높이를 알 수 있다."는 등 대 여섯가지 답을 제시해 교수를 놀라게 했습니다.


원래 문제의 출제 의도는 고도(高度)가 높아질수록 기압이 낮아지는 원리를 이용, 기압계로 지면과 건물 옥상의 기압차를 측정해 건물의 높이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늘 같은 답만을 가르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학생이 바로 닐스 보어(1885~1962)입니다. 그는 새로운 원자모델을 만들어 양자역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문제는 99학년도 서울대 지필고사에도 출제되었습니다. 보어가 당시 생각해낸 답 중에 스스로 가장 만족한 것은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답을 쓰고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이 있었을까요?

이영완 기자, 동아 사이언스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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