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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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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는가

공진성 2023. 8. 31. 16:34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리는 어디에서 비롯할까? 17세기 영국의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후배 존 로크는 자식을 잘 양육하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부모에게 순종할 자식의 의무도, 자식을 잘 길러야 할 부모의 의무도 모두 신(자연)의 뜻에서 찾았다. 이 신적 의무에서 권리도 생겨난다. 부모의 양육을 받을 자식의 권리나 자식의 복종을 받을 부모의 권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할 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로크는 이 권리나 의무가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를 근거로 이미 성인이 된 백성을 지배할 왕의 권리와 의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선배 토마스 홉스는 백성에 대한 주권자의 권리를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체결하는 계약에서 도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이 주권자가 백성을 돌본다는 사실을 통해 정당화했다. 부모가 자식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만 데려다가 길렀기 때문이라고 홉스는 생각했다. 낳았으니 책임지고 길러야 한다는 규범은 국가가 법을 제정해 양육의 의무를 부모에게 부과한 후에나 성립하지, 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돌보는 자에게는 권력이 부여되었고, 돌봄을 받는 자에게는 그 권력에 복종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로크식으로 이해하건 홉스식으로 이해하건 간에 부모가 자식을 돌보고 자식이 부모의 돌봄을 받는 이유는 부모가 성인이고 자식은 아직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은 합리적이어서 자기를 스스로 돌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남을 돌볼 여유도 있다. 그러나 아직 성인이 아닌 사람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분히 자라지 않아서 자기를 스스로 돌볼 수 없고 남도 돌볼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어린 자식뿐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다 자란 여자나 노예 등도 정신적으로 부족해서 자기는 물론 남을 돌보고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들이 집에서 여자와 노예의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말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은 성인 남성 자유인만의 직접 참여를 통해 운영되었다.

민주화의 역사는 참정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지는 과정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수단이 처음에는 재산의 보유였고, 나중에는 세금 납부였으며, 때로는 로 대신 납부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자기를 스스로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었다. 남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고 온전한 사람만이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유지된 채로 다만 남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의 범위만 넓힌 것이 20세기 민주화의 역사였다. 겉으로 온전해 보이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게 남의 돌봄을 받고 있으며 제아무리 온전한 사람도 평생 그런 온전함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간과되었다.

-, -, 장애-비장애 등의 차이와 무관하게 인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때는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온전하다고 말했다면, 이제는 남성도 여성도 모두 남의 돌봄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한때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똑같이 존엄하다고 말했다면, 이제는 비장애인도 잠재적 장애인이라고 말한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국가가 없듯이 남의 돌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모두 한때 남의 돌봄을 받고 자랐으며 언젠가 남의 돌봄을 받으며 늙어가고, 지금도 숨은 돌봄의 손길 덕에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 노릇을 하며 산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인간의 그런 평등성에 근거해 사회 구성원이 서로 돌보는 의무를 기꺼이 이행하는 것이 바로 돌봄 민주주의이다.

지난 4월 출범한 광주다움 통합돌봄은 아직 관 주도의 복지 정책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기존의 선별주의와 신청주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통합적 접근을 통해 이미 많은 성과를 내고 있으며, 시민들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킬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광주가 의욕적으로 시작한 돌봄 정책이 광주를 바꿔 마침내 대한민국을 돌봄 민주국가로 만들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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