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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4.10 총선, 전망과 과제 (광주YMCA 제105차 시민논단 발제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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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총선, 전망과 과제 (광주YMCA 제105차 시민논단 발제문)

공진성 2024. 3. 3. 10:55

작년에 우리는 두 개의 커다란 선거를 치렀다. 그런데 내년에 또 전국 단위의 선거를 치른다. 사람들의 정치적 관심이 온통 선거에 맞춰져 있다. 누구 말마따나 선거가 너무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 같다. 정치의 수단에 불과한 선거가 정치 자체를 잡아먹고 있는 양상이다.

민주적 정치의 중요 수단인 정당이 선거를 위한 조직이 되었고 선거전문가 집단이 되었다. 선거에 맞춰 조직을 쇄신하고 인물을 영입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벌써 내년 총선을 위해 양당 모두 비대위 체제로 전환해야 하는 것 아니냐, 싹 다 물갈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온다. 이제는 각 정당의 지지자들조차 그런 시각에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각종 노래경연대회가 음악의 창작과 공연을 압도하고 있듯이, 선거라는 경연대회가 정치를 압도하고 있고, 유권자인 시민을 그저 투표 참여자와 여론조사 응답자로 동원하고 있다. 그러니 문자투표에만 참여하고, ‘문자폭탄은 보내지 말라는 말이 유권자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기본적으로 중앙정치적 일이지만, 동시에 지역정치적 일이기도 하다. 각각의 지역에서 작은 선거구 단위로 국회의원을 뽑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의 일을 담당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 당위와 무관하게, 그래서 지역의 민원을 해결해줄 대리인을 뽑으려고 하는 현실도 병존한다. 총선을 앞둔 사람들의 시각은 동시에 여의도(국회)와 광주 또는 전남에 맞춰져 있다. 좋게 말해 중첩적 시각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시(斜視)이다.

백 년 전 막스 베버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머신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재 광주ㆍ전남의 선거정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역 전체의 보스는 없지만, 작은 지역구마다 작은 보스들이 있고, 그 보스들을 후원하는 (지역적 이해관계를 가진)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동원하는 유권자들이 있다.

머신들이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특히 호남처럼 특정 정당의 세가 강한 지역의 당내 경선에서는 더 쉽게, 강한 힘을 발휘한다. (중대선거구제로 바꾼다 한들 이 머신의 영향력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 같다.) 대단한 홍보전략과 동원전략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지역의 선거는, 군사적으로 비유하자면, 최첨단 무기가 필요한 전장이 아니라, 여전히 재래식 무기와 병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전장이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그러나 저들과 마찬가지로 참여 의지와 권력 의지는 있는, 그래서 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지상전 대신 사이버전을 택한다. 이들은 라디오나 유튜브 방송, 인터넷 포털과 게시판을 통해 정치적 소식을 접하고 의견을 형성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앙정치적 시각에서 지역의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이들에게는 지역의 정치인들이 늘 못마땅하다. 중앙정치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당내 주류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는 지역의 정치인들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쉽게 물갈이론에 경도된다.

지역에서 출마하기 위해 늘 빈틈을 노리는 입지자들에게는 이런 물갈이론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현역 물갈이 여론이 높아져야 자신들에게 기회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정 후보가 물러나야 할 구체적인 이유나 자신이 당선되어야 할 타당한 근거의 제시는 없이 추상적인 범주를 들먹이며 인적 교체를 주장한다. ‘구태 정치인들은 물러나야 한다거나, ‘86 정치인들은 이제 퇴장해야 한다거나, ‘젊은 정치인이 국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식이다.

자기가 현역이면 지역에 다선의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자기가 공천 못 받으면 호남 홀대라고 말하고, 자기가 도전자이면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입장에 따라 말을 바꾸고 정치혐오를 부추기면서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4년마다 반복해서 보는 일반 유권자들은 실망을 넘어 절망하게 된다. 그런데도 최악이 선택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심정으로 투표에 또 참여한다.

 

2020년 총선이 코로나 총선이었다면, 2024년 총선은 포스트-코로나 총선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후 치러진 총선에서 당시 여당은 압승을 거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3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치러진 선거였고, 북미 관계 정상화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뒤였고, 이른바 조국 사태로 인해 정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한층 커진 상황이어서 여당에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초유의 팬데믹 사태 속에서 다수 유권자는 정권 안정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번 포스트-코로나 총선에서 다수 유권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정권 안정을 위해 여당을 지지할까, 아니면 정권 견제를 위해 야당을 지지할까?

경제 위기의 먹구름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대한민국에 드리워져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풀린 돈을 회수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렸고, 높은 금리 탓에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지만, 물가를 다시 낮추기 위해 금리를 내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깡통전세와 주택 미분양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공공요금 인상을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총선 뒤로 그 시기를 미루기 위해 정부와 여당은 노력하겠지만, 이미 세수는 고갈돼서 정부가 거액의 이자를 지불해가며 마이너스통장을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려온다.

냉전 종식 후 경제적 세계화의 이익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함께 누리던 시기가 지나고 국익 중심의 노골적 경쟁의 시기가 돌아왔다. 시대착오적 자유민주주의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미국 중심의 진영 경제 안에서 국익을 최대화할 수 있다고 믿으며 동맹 강화만을 외치는 대통령의 대외정책이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 상황을 더 어렵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북 강경 정책으로 인해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한층 더 높아지면 경제 상황은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이런 악조건이 북풍이 되어 보수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통상적으로 경제 상황이 어려우면 여당에 불리하고, 경제 상황이 좋으면 여당에 유리하다고 한다. 그래서도 정부와 여당은 올해와 내년에 불어닥칠 경제 위기의 탓을 지난 정부와 민주당에 돌릴 것이다. 그 탓 돌리기가 과연 유권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들릴까? 기실 정부와 여당은 지난 1년 내내 전 정부 탓을 해왔다. 전 정부 탓이 없지는 않겠지만, 집권 2년이 되는 시점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유권자들에게, 특히 무당파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총선 1년을 앞두고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다수 국민은 내년 총선에서 여당보다는 야당을 찍겠다고 답했다. 문제는 야당이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라는 것이다. 어느 야당이 반사이익을 얻게 될지도 관심의 대상이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선거법 개정 논의가 과연 소수 야당에 전보다는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지, 아니면 양대 정당에 유리한 쪽으로 결론을 맺게 될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선거법이 어떻게 개정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할까? 공익에 대한 이해도 사람마다 다르지만, 각자의 선 자리가 달라서도 선거법 개정의 방향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차피 각자의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면, 광주ㆍ전남을 포함한 지방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지방 소멸의 위기 속에서 지방의 합리적 수축에 도움이 될 제도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가 지방의 합리적 수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정과 선거의 단위들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여 공간의 합리적 수축을 방해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지방 소멸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이래로 통용되는 지배의 오래된 철칙이 있다. ‘divide et impera’, ‘나누어 지배하라!’ 지배의 대상을 작게 쪼갤수록 저항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지배는 쉬워진다는 뜻이다.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서 볼 때, 지방이 작게 나뉘어 있을수록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기가 더 쉬워진다. 반대로 지방이 크게 뭉쳐 있고 덜 나뉘어 있을수록 중앙의 일방적 통제는 어려워진다. 지방이 작게 나뉘어 각자 생존하기 위해 경쟁하고 중앙의 교부금을 조금이라도 더 타내기 위해 노력할수록 중앙의 통제력은 커지고 지방의 생존능력은 줄어든다. 주민자치와 지방자치를 구분하고, 소규모의 주민자치와 별개로 작동하는 대규모의 지방자치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광역 단위의 공간 계획이 가능할 수 있도록 선거의 단위가 조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민들에게 더 나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주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작은 단위로 나뉘어 경쟁하면, 그 경쟁의 결과로서 모든 단위의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설픈 수준의 문화ㆍ행정ㆍ복지 서비스만 제공될 것이다. 충분한 서비스 수요가 있어야 양질의 서비스 공급이 가능하고, 그러려면 같은 수의 인구도 모여 살아야 한다. 즉 공간이 수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방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현재의 선거 제도는 기능적으로 역작용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그런 의미에서 지방 소멸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비례대표 몇 석을 그렇게 배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비례대표제를 전면 도입하고 초광역 지자체 단위로 실시하면 효과가 클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춰 초광역 지자체에 권한을 몰아주고 비례대표제ㆍ의회중심제 방식으로 운영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 유권자들이 비례대표제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우선, 대통령제와의 호환성 문제가 있다. 국회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양극화의 이유를 소선거구제에서 찾곤 하는데, 중대선거구제나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더라도 대통령제를 그대로 두는 한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회 차원에서는 다당제 현상이 나타나겠지만, 대선을 앞두고 진영별로 선거 전 단일화 협상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고,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그 협상이 다만 1차 투표 뒤로 미뤄질 것이다.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하는 정당은 여전히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일반 국민이 비례대표제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 다른 이유는 공천 과정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각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 공천 과정을 매우 불투명하게 느끼는 일반 국민은 기존의 적은 비례대표 의석조차도 많다고 여기고 차라리 없애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전체 의석을 비례대표 방식으로 선출하자는 주장에 선뜻 동의할 리가 없다. 일반 국민이 가진 이 느낌을 긍정적 경험 없이 논리적 설득만으로 지우기는 어렵다. 지역구 선거보다 더 공정한후보 선출 방식과 순서 결정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를 체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론적으로 사표가 줄어들고 표의 등가성이 높아진다는 식으로 주장해봐야 소용이 없다.

일반 국민이 다당제 자체를 선호하는지도 (현 상황에서는)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그것이 국민의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반영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반 국민은 비토크라시현상, 즉 국회의 합의 불능 상태에 신물이 나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당내의 이견 표출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당과의 타협을 애초에 거부하면서 패스트트랙을 써서라도 강행 처리하기를 오히려 바라기까지 한다. 다당제가 자리 잡고 연합정부의 형성이 정상적인 정치과정이 되어야 정당 간의 합의가 더 쉽게 이루어진다는 주장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두 개의 정당도 서로 합의하지 못하는데, 더 많은 정당이 교섭단체가 되어 서로 상대의 발목을 잡으면 합의가 더 요원해지지 않겠냐는 상식적반응이다. (의원 정수를 늘리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300명도 서로 합의를 못 하는데, 그 수가 늘어나면 더 못 하지 않겠냐는 우려이다.)

민주주의가 권력자의 자의적 결정을 막는 제도이고, 정책 결정을 신속하게 하기보다 신중하게 하도록 하는 제도이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라는 말이 일반 유권자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경제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은 비용을 최소화하고 효용을 최대화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모든 영역에서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행정), 정치적 판단도 (유사)전문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온전히 경제 활동에만 몰두한다. (고대의 시민이 경제에서 해방되어 정치에 참여했다면, 현대의 시민은 정치(행정)에서 해방되어 경제에 참여한다.) 그리고 대신 잘 판단하고 집행할 것 같은 스트롱맨과 전문가의 지배를 점점 더 선호한다. 이 선호는 대통령 지지 정당이 다수당이 되는 것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정치를 비용 면에서 더 효율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스스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계속 갉아먹고 있다. 선거는 상호 불신을 최대한 부추기면서 차악 선택의 합리성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게임이 되었다. 과연 다가오는 총선을 통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 있을까? 어느 정당이 승리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다음 총선의 과제는 바로 민주적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이다. 그러려면 민주주의가 부에 대한 약속, 성공에 대한 약속, 효율성에 대한 약속이라는 오해부터 바로잡혀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선거판에는 부자(가 되고 싶은 자)와 성공한 자, 효율성의 화신이 넘쳐나고 있다.

정당정치의 공급자 측면에서도, 소비자 측면에서도 모두 심각한 문제가 관찰되고 있다. 공급자 측면에서는 인생 2모작, 3모작 정치인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 정치를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정치를 첫 번째 직업으로 선택하려는 사람은 적고, 다른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일하다가 은퇴 후에 가지게 된 여유와 경력을 밑천 삼아 (아마추어) 정치인으로 변신하려는 사람만 많다. 현대 사회는 고도로 복잡하다. 그러므로 다양한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정치에도 필요하다. 그런 사람을 정치 안에서 길러내는 것과 정치 밖에서 길러 정치 안에 들여오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민주주의, 즉 시민의 자유에 더 적합할까?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이삼십 년 직업생활을 하면서 형성한 습속을 직업정치를 시작하면서 단번에 버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이른바 ‘86세대운동권 정치인들의 습속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과거 20대 시절 거리에서 투쟁하던 방식으로 나이 들어서도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이삼십 년 다른 직업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있을 습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비로소 사람들이 검찰 출신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곤 하지만, ‘검찰 공화국운운하며 현 정부를 비판하는 야당에도 검찰 출신의 총선 출마 예정자들이 줄을 서 있다. 학생 운동권 출신만 문제이고, 검찰 출신만 문제인가? 행정관료 출신은 문제가 아니고, 사업가 출신은 문제가 아닌가?

인생 2모작, 3모작 정치인이 계속 늘어나는 현실은 우리의 정당정치가 직업(프로페셔널)정치인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는 유권자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젊은 정치인을 선택해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춰가며 성장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보다 얼핏 보기에 이미 그런 전문성을 갖춘 것 같은 전관들을 선호하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 그 결과는 전관들의 지배이다. (한국 사회 전체가 사실상 전관들의 세상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모든 사람의 노후 연금을 보장하기 위해 정년을 연장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두둑한 노후 연금이 보장된 사람들이 정치를 비롯한 온갖 영역에서 자기 정년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정작 모든 국민의 연금 보장을 위한 개혁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유권자들이 전관출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단기 수익만을 노리고 주식에 투자하는 것과 같다. 그런 투자자가 많으면 기업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듯이, 그런 유권자가 많으면 정당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유권자의 이런 단기 수익 중심의 소비행태는 결국 정당을 선거 때마다 조금 전에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조직으로 만들고, 축적이 없는 조직으로 만들고, 성장이 없는 조직으로 만든다.

그런데 과연 이런 조직이 유권자에게 단기 수익이라도 보장하는 것일까? 옷을 갈아입고 출마하는 전관들이 정말 유권자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는 할까? 그들이 가진 부와 성공, 효율성의 이미지가 정말 그들을 선택하는 유권자를 배신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까? 그들이 이삼십 년의 직업생활을 통해 얻은 습관대로 정치를 함으로써 사실상 출신 조직의 이익에 봉사하거나 그저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지는 않을까? 아마추어 정치인을 다른 아마추어 정치인으로 바꾼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프로페셔널(직업) 정치인을 길러낼 수 있는 정치적 생태계를 형성해야 한다.

 

정당정치의 소비자 측면에서 관찰되는 심각한 문제는 참여의 양극화이다. 한편으로 관찰되는 과잉 참여는 정당정치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관찰되는 과소 참여는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의 정당성 결핍을 초래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사회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상대적으로 더 단순해진다. 전문가의 인식과 대중의 인식이 멀어질수록 대중은 전문가를 불신하게 되고, 전문가는 그런 대중을 혐오하게 된다. 그 틈을 파고드는 사이비 전문가들이 세상에 대한 단순하고 납작한 이해를 제공하며 인기를 누린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이동한다. 나이가 들어 직업을 가지고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해 사는 경우에도 여전히 많이 이동하며 생활하지만, 아직 그런 직업적 안정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이 마치 임시거주지와 같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자신이 사는 곳에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사는 반면, 오랫동안 한곳에 거주하며 이미 많은 정치적 자본을 쌓은 사람들도 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주민자치는 시간 여유도 있고 정치적 자본도 많이 가진 사람들끼리의 자치가 되곤 한다. 시간 여유도 없고 해당 지역에서 아무런 정치적 자본도 쌓지 못한 사람은 그래서 자신의 시간 사정에 맞춰 움직이는 사이버 세계의 정치에 참여한다. 때마침 고도로 발달해 있는 인터넷 매체는 이들에게 필요한 정치적 정보와 판단을 입맛에 맞게 제공한다.

정당정치의 공급자 측면과 소비자 측면은 서로 맞물려 있다. 생활체육이 발달한 사회에서 프로체육도 발달한다. 음악애호가가 많아야 전문음악인도 많아지고 그들의 수준도 높아진다. 정당정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마추어 정치인과 프로 정치인이 혼동되고 있고, 아마추어 정치인이 성장해 프로 정치인이 되는 길이 막혀 있다. 장차 프로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훈련의 기회는 제공되지 않고, 갑자기 종목을 바꾼 프로 같은 아마추어들이 각 프로구단의 드래프트에 참여해 선수로 뛴다. 사정도 모르는 팬들은 열심히 자기편 구단을 응원하고, 누가 더 못하나 경쟁하는 듯한 시합을 보며 욕하고 외면했다가도 마지못해 다시 응원한다. ‘내가 뛰어도 너보다는 더 잘하겠다고 소리치는 팬들도 정작 스스로 공 한 번 차 본 적은 없다. 그럴 여유가 없다. 구체적 경험이 없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어서 관여는 하고 싶은데, 이른바 선수들이 잘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그저 화가 나고 답답할 뿐이다.

고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경제에서 해방되어 정치와 행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정치와 행정에서 해방되어 경제에 참여한다. 고대의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국가가 아마추어 정치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국가는 그렇지 않다. 행정도 정치도 아마추어가 할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처음부터 능숙한 행정가일 수 없듯이, 처음부터 능숙한 정치가일 수는 없다. 직접 경험하면서 배워야 한다.

전문적 분업화는 피할 수 없다. 행정 전문가와 정치 전문가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행정 전문가를 길러내는 과정은 있지만, 정치 전문가를 길러내는 과정은 현재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과도기에 아쉽더라도 차선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유권자도 장기적 지향만은 잊지 말아야 하고, 차선으로 선택된 사람도 자신의 과도기적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년 총선의 전망과 과제는 각 당의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일 것이고 달리 파악될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전망은 어둡고 과제는 많을 것이다. 당파적인 사람들은 그 어두움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보면서 그 빛으로 어둠을 뚫고 선거에서 승리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기적 해법의 발견이나 선거 승리가 현재 한국 정치의 상황이나 지방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선거는 짧고 정치는 길다. 우리가 처한 곤란한 상황을 직시하고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선거와 정당정치에 과도하게 쏠린 우리의 관심을 정치의 본질인 시민의 자유와 정치 생태계의 구축에 맞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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