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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과 정치

공진성 2024. 1. 24. 09:01

당원 동지 여러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당에 속해 있지 않던 사람이 선거 출마를 위해 정당에 가입한 뒤 마치 늘 정당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낯설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하다. 동지(同志)목적이나 뜻이 같음,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목적이나 뜻이 전부터 같았다면 왜 전에는 당원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같아진 것이라면 그 목적이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일찍이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에 정의(正義)가 없으면 강도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익을 위해 뭉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수가 더 많고, 그래서 강해보일 수 있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그 성향 때문에 결국 서로 더 많이 가지려다가 분열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비록 수가 적어도 더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목적이고 어떤 뜻인가? 현대 정치학에서는 다른 이익집단과 구별되는 정당의 특징을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에서 찾는다. 정당이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사실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지만, 당위의 제시이기도 하다. 정치권력을 수단으로 이용해 그 이상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20세기의 전체주의가 그런 가치지향적 태도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저 정권 획득을 위해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이 번갈아가며 지배하는 것으로 충분한 이유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어야 하므로 그런 경쟁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공급자 간 경쟁이 소비자에게 궁극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의 정치적 버전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경쟁의 부재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다.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기업은 상품을 더 잘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합리적 소비자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고,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품을 선택할 것이다. 경쟁만 있으면 결과는 좋을 것이다. 우리의 정당 정치에 경쟁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경쟁의 규칙을 더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거나,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가로막는 문턱을 더 낮춰야 한다거나, 거대 양당의 독과점이 문제라거나, 지역적으로 나타나는 1당 독점 현상이 문제라는 말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정말 경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까? 상품 시장의 경쟁에서 더 좋은 제품보다는 광고를 더 잘 하는 제품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듯이, 정당의 경쟁에서도 그렇지는 않을까? 만약 경쟁 자체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면, 경쟁의 부재 자체도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경쟁 자체를 중요시할 때, 어느 정당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호남에서 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이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이 민주당의 노선에 꼭 동의해서만은 아니듯이, 수도권에서 출마하려는 사람이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도 민주당의 노선에 꼭 동의해서만은 아니다. 하필 자신이 전라도 사람이거나, 하필 자신이 출마하고자 하는 곳에 전라도 사람이 많이 살거나, 그때 여당이 민주당이거나, 아무튼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당선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민주당을 선택하곤 한다. 하물며 전라도에서 출마하려는 사람이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당내 경선에서 당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당원 동지 여러분!” 이렇게 외치는 예비후보자와 그 말을 듣는 당원들은 도대체 어떤 목적과 뜻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을 묶고 있는 것은 정치권력의 획득, 즉 선거 승리라는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자신이 모집한 당원들과 함께 얼마든지 그 당을 버리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당 안의 경쟁은 당 밖의 경쟁으로 바뀐다. 이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 경쟁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전남의 무소속 출마자들을 미래의 희망으로 추켜세울 법한데도 무소속 출마 현상을 민주당의 공천이 엉망으로 진행됐다는 증거라면서 비판한다. (물론 지속적으로 선택지를 제공하는 정당은 책임정치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무소속 출마자가 제공하는 일시적 경쟁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8회 전국동시지방자치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가 508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절반 이상이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나왔다. 두 지역의 1당 독점 상황을 비판하기에 너무 좋은 소재이다. 그런데 양당의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에서도 상당히 많은 수의 무투표 당선자가 나왔다. 기초의회 선거구에서 양당이 사이좋게후보자를 반씩만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당 차원에서 볼 때, 전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쪽보다 안전하게 적은 승리를 얻는 쪽을 합리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마치 시장의 행위자들이 가격 담합을 한 것과 비슷한 상황인데, 그런 행위를 공정위가 적발하여 과징금을 부과하듯이 선관위가 개입해 벌금이라도 부과해야 할까? 일각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지역주의 투표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총선에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면, 아마도 양당이 이런 식의 담합을 통해 전국적으로 고르게 의석을 나누어 가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지역의 일부 언론은 호남 지역에서 무투표 당선자가 이렇게 많은 것이 민주당 독점 구조 탓이라고 말한다. 부분적으로는 맞고, 부분적으로는 틀렸다. 호남에서 민주당이 독점적 지위를 누린 것은 오래되었지만, 무투표 당선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유효 정당의 수가 줄었다. 지난 4년 사이에 많은 정당이 사라졌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정당이 있고 신생 정당도 있지만, 모든 지역에 골고루 후보를 낼 수 있고 당선자도 배출할 수 있는 전국적 유효 정당의 수가 줄었다.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국민의힘과 합당하면서 지난 10년 동안 이어져온 이른바 3지대 정당운동은 사실상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정당들과 이러저러한 형태의 연대를 모색했던 정의당도 그저 3의 정당이 되어 버림으로써 이념정당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유효 정당의 수가 줄어든 이유는 출마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당선 가능성이 낮은 정당을 외면하기 때문이고, 정당이 이처럼 그저 당선만을 위한 수단으로 변한 이유는 정당 자체가 정치권력의 획득, 즉 당선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당선가능성과 상관없이 이른바 험지에서 몇 번이고 떨어져가며 출마하던 바보들은 이제 정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애초에 당선가능성을 고려하여 정당을 선택하고, 그러고서도 자신의 당선에 불리하면 기꺼이 정당을 떠나 다른 정당을 선택하거나 차라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합리적인 사람들만 많다.

지역적 1당 독점 현상과 전국적 양당 과점 현상은 선거제도의 탓이기도 하지만, 현행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완전히 비례대표제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그저 정치권력의 획득만을 목적으로 하는 변별력 없는 집단인 한, 그래서 당원들도 그저 누군가의 선거 승리만을 위해 모집된 존재인 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비례대표 명부에, 그것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상위 순번으로 오를 가능성이 높은 정당을 찾는 형태로 달라질 텐데, 그런 일은 비례대표 의원의 수가 적은 현재의 상황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다.

서구에서,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정당의 탈이념화가 이루어진 데에는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하나는 16세기 이후의 종교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20세기의 사회주의 운동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기독교 세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싸웠다. 종교적 신념은 정치적 당파의 싸움을 더 치열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정치와 종교의 전근대적 일치를 유럽적 차원에서도, 일국적 차원에서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사람들은 종교를 사사화(私事化)하고 정치를 또한 세속화함으로써 지상에서의 평화를 회복하려고 했다. 이제 정치적 당파들은 세속적 이익을 두고 대립할지언정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서로 싸우지는 않게 되었다. 정치권력을 무력으로라도 획득하여 종교적 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열정이 사그라진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줄 알았던 열정이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20세기에 다시 나타났다.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화들짝 놀랐고, 정치를 다시 종교화하려는 당파적 인간들을 배제하고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탄생했다.

한국의 정당 정치도 비슷한 과정을 압축적으로 거치는 중인 것 같다. 최장집 교수는 1980년대로 대표되는 운동의 정치가 이제 정당의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당간의 경쟁이 활발해지고 그 결과로 대표성이 높아지면 정치가 사회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과거의 운동정치적 습성을 버리지 못한 정당이 독선에 빠져서 비타협적 대결을 일삼는 것이다. 그래서 정권교체가 필요하다고 얼마 전까지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주장했다. 이들의 생각에 정당은 어떤 옳은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저 (권력 획득이라는) 목적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한 정당이 잘못하면 등가의 다른 한 정당으로 교체하면 된다.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당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최소주의적 민주주의 관념에 따르면 선거패배가 곧 잘못했다는 증거이다. 유권자의 지지를 잃었으니까 진 것이고, 졌으니까 잘못한 것이다. 잘못했으니까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 일종의 순환논법인데, 여기에서는 옳고 그름이 판단의 기준이 아니다. 다수 당원의 선택이 기준이고, 궁극적으로는 국민 다수의 선택이 기준이다. 선험적 기준을 함부로 끌어들이는 것의 위험성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예 선험적 기준을 버리고, 경쟁적 정당 체계와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이 낳는 결과를 잠정적 기준으로 채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당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삼게 된 사람들이 이런저런 기회구조 안에서 선택하는 선거기획사 같은 것이 되었고, 유권자는 경쟁하는 기획사들이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상품 패키지들을 비교해보며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소비자가 되었다.

선거 출마자 연합처럼 변한 정당을 비판하며 한때 대중에게 정당으로 쳐들어가라고 외쳤던 강준만 교수는 이제 누가 정치를 종교로 만들었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과연 정치는 (아브라함에게 자식까지 바칠 것을 요구하는) 종교가 되었을까, 아니면 그저 판돈이 많이 걸린 치열한 경기가 되었을까? 전국적 무투표 당선 현상을 보면 경쟁의 치열함조차 이제는 사라진 것 같고, 언론이 연일 비판하는 이른바 팬덤현상을 보면 정치가 정말 종교가 된 것도 같다. 그런데 혹시 이 두 가지 모순처럼 보이는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은 아닐까? 오늘날 정당 정치가 (진리의 추구와 무관하게 죽은 교리만을 붙들고 있는) 종교처럼 변했고, 그래서 그럴 듯한 이념적 외피를 걸치고는 있지만, 사실상 정치권력의 획득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당들이 서로 비슷하고, 그래서 정치권력을 획득한 후에 하는 일도 (정치인 자신의 이익과 지지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고, 그래서 이익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쉽게 타협도 하고 담합도 하지만, 그들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만 마치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처럼 열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닐까?

경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경쟁인지가 중요하다. 의미 없는 경쟁은 경쟁이 없는 것만 못하다. 경쟁이 필요한 이유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그것이 내가 믿는 진리를 살아 있는 진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광주의 투표율 37.7%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유권자들은 단순히 경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보이지도 않지만, 단순히 경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거두지도 않는다. 이념 없는 정당은 차별성을 잃고, 차별성 없는 정당들의 경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경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돈을 건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중계 보도하는 사람들뿐이다.

정당은 당원들을 대표하고, 또 지지자들을 대표한다. 그래서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이 있어야 대표되지 않는 사람이 줄어들 수 있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우리 안에 대표되지 못하는,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대표를 그렇게만 생각하면 사실상 정치적 대표는 불가능해지고, 모두가 직접 결정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러나 직접 참여하는 것도 사실은 대표이다. 나는 나의 더 나은부분으로 하여금 나를 대표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대표는 그러므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우리의 더 나은 모습의 표현이다. 정당은, 그리고 정당의 공천을 받아 선출된 대표자들은 우리의 더 나은 모습이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부족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되고 싶어 하는 더 나은 모습이어야 한다. 정당과 정치인이 이런 가치지향성을 잃고 자기 자신과 지지자 집단의 욕구에 투항하면 차별성을 잃게 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에만 몰두하게 된다.

대표자들 스스로 자신의 더 나은 부분이 자신을 대표하도록 해야 하고, 당원과 유권자의 더 나은 부분, 즉 이성적인 부분을 대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욕구를 억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 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더 나은 삶이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물어야 한다.

현대 국가는 관료제적 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합리적 관료기구는 그 도구적 합리성 때문에 질문하지 않는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그러나 정당은 물어야 하고, 지지자들과 함께 답을 찾아야 한다. 이때 뜻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동지이다. 그 뜻을 펼치기 위해 정치권력의 획득이 필요한 것이지, 아무런 뜻도 없이 정치권력의 획득만을 위해 정당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이 글은 2022년 6월 14일 더불어민주당 광주광역시당이 주최한 제8회 전국동시지방자치선거 당선자 워크숍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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