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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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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정치적 낭만주의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진성 2022. 3. 23. 17:33

헤어프리트 뮌클러/ 2022316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탈영웅적 사회들이 비영웅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영웅주의는 모두를 끔찍한 전쟁으로 끌어들인다. 그 대신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한 사회를 탈영웅적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그 사회가 영웅적이지 않다는 진단과 같은 것이 아니다. 비영웅적unheroisch 사회가 하루아침에 영웅적이 될 수는 없다. 탈영웅적postheroisch 사회는 더욱 그렇다. 칼 슐뢰겔은 자신의 기고문 러시아 도시들의 어머니 위로 폭탄을(Bomben auf die Mutter der russischen Städte, F.A.Z. 2022312)에서 “‘탈영웅적 시대의 시작’(헤어프리트 뮌클러)”이라는 말은 무지의 표시, 현학적 태도일 뿐이라고 판결할 때 그것을 혼동했다. 그는 자신이 시대를 진단하는 개념의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그리고 접두사 (post)-’(un)-’를 구분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전쟁이라는 도전과 그에 대한 서방의 대응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구분은 불가결하다. 이 둘을 서로 혼동하는 사람은 정치적 낭만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탈영웅적 사회들은 큰 희생을 치른 마지막 전쟁을 돌아보고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영웅적 사회들에서는 그 반대로 젊은 세대가, 최소한 그들 중 목소리가 큰 일부가, 선조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싶어 하고 영웅으로서 돌아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고 싶어 한다. 이런 영웅적 사회들의 시대는 유럽에서 짧았다. 그 시대는 사실 프랑스혁명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지속됐다. 그 전에는 사회 전체가 아니라 특정 계층들만 영웅적 에토스를 가져야 했다. 예컨대 귀족들은 영웅적 에토스에 근거해 자신들의 평판과 우월을 주장했다. 구체제가 혁명을 통해 무너지면서 민중이 영웅적 태도를 넘겨받았다. 그것을 오늘날 프랑스 국가 마르세예즈의 가사와 멜로디에서 여전히 들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제1차 세계대전의 물량전 속에서 산산조각 났다. 이후 처음으로 다신 안 돼(Nie wieder)”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것이 탈영웅적인 것의 구호이다.

사람들과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이야기하면 얼마 전까지는 의심할 바 없이 우크라이나에서도 이 다신 안 돼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우크라이나 역시 탈영웅적 사회였고 여전히 탈영웅적 사회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독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다. 두 나라를 구별해주는 것은 과거의 영웅시대에 대한 특수한 기억이고 이때 결정적인 것이 침략전쟁인지 방어전쟁인지, 즉 전쟁을 일으킨 쪽에 속하는지 침략자에 맞서 방어해야 했던 쪽에 속하는지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전쟁에서 결국 이겼는지 졌는지가 또한 역할을 한다. 방어해서 이겼다면, 희생한 사망자들은 공양(sacrifice)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공격해서 졌다면, 피해(victim)가 지배적 개념이 된다. 범죄적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희생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영웅적인 것의 구호인 다신 안 돼가 이 두 가지 경우에 상이하게 울리며, 그러므로 영웅적인 것을 동원하는 자원으로서의 집합적 기억이 상이하게 작용한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1941부터 1945년까지의 위대한 애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독일인들에게는 마지막에 독일 도시들에도 피해를 준 범죄적 전쟁에 대한 기억이다.

러시아도 탈영웅적이다

그것은 기억의 차이이다. 그 반대로 두 경우 모두 사회적인 것의 엄격한 데이터와 군사적 긴장 고조의 위험은 경향적으로 동일하다. 탈영웅적 사회들은 출생율이 낮다. 그 사회들은 젊은 세대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구조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반대로 출생율이 매우 높은 곳은 종종 악명 높게 호전적인 사회들과 관련이 있다. 가자지구가 그 한 가지 사례이고. 1980년대의 이란이 또 한 가지 사례였으며, 아프리카와 아랍의 몇몇 국가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이스라엘은 예외적인 경우인데 끊임없이 최신 무기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젊은 세대를 주의 깊게 다루는 강제로 영웅적인 사회이다.

인구통계를 살펴보면 러시아 역시 탈영웅적 사회임이 드러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종료 단계에 모스크바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전사한 아들의 사진을 들고 길거리로 나왔던 소련 말기에도 이미 탈영웅적 사회였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명백히 러시아의 전략은 더 큰 손실을 피하라는 지시 아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전투부대들이 시가전을 감행하기를 망설이고, 그 대신 대도시의 보급선을 끊고 남아 있는 주민들을 대포와 미사일 발사로 위협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탈영웅적 전쟁수행인데, 이것은 군인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민간인들을 인질로 이용하기 때문에도 거의 언제나 영웅적인 전쟁수행보다 더 잔혹하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과 그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또한 주시해야 한다.

영웅주의 대신 전략적 성찰을

더욱이, 영웅적 사회들의 전쟁수행은 목적-목표-수단 계산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런 계산이 탈영웅적 전쟁에는 대체로 부족하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고조시키는 세 가지 동인들과 어떤 행위자가 매번 모든 것을 한 장의 카드에 걸 필요가 없도록 하는 또 다른 세 가지 제한하는 요소들을 대립시킬 수 있었다. 그것이 고조의 우위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전쟁 발발 전에 이미, 그리고 전쟁 발발 이후로 반복해서 푸틴은 핵무기로 위협했다. 서방이 특정 무기를 나르고 비행금지구역을 관철하는 식으로 단호하게 개입함으로써 그가 이 전쟁에서 패배를 감수해야 할 때에도 푸틴이 그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칼 슐뢰겔이 자신의 글 마지막 부분에서 제안한 것은 키이우에는 무기가 필요하고. 러시아 침략자들에 대해 공중을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며, 베를린을 구했던 공중보급로(Luftbrücke) 같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불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방, 즉 나토를 즉시 전쟁당사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비행금지구역을 또한 관철해야 하고, 그것의 관철은 오직 공중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영웅적인 것의 낭만은 전략적 성찰 능력이 결핍된 곳에서 확산된다.

공격적인 상대와 관련되어 있고 자기의 소극적 행동을 통해 이 상대가 점점 더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무엇인가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우크라이나에 해당한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이후 지속적으로 위협받았고 서방은 자기가 늘 표방했던 규칙에 반해 우크라이나를 굴욕적으로 방치했다. 서방이 갈등의 고조를 피하기 위해 푸틴의 러시아에 맞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대가를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서방도 치러야 한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서방이 푸틴의 탱크에 넘겨준 규칙들과 가치들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서방에서조차 사람들은 그 규칙들과 가치들이 적어도 자기의 공간에서 존중되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보편적 가치가 지구적으로 유효하다는 말은 이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공격은 그저 러시아가 약속을 지킨다는 말을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나토가 약속을 지킨다는 말도 의문시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1994년의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에서 러시아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도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파산으로 인해 그들의 것이 되었고 그들의 영토에 있게 된 핵무기를 러시아에 내주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저해하는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억제할자신들의 의무를 확인했고, 동시에 자기방어를 위해서가 아니면 우크라이나에 대해 어떤 무기도 사용되지 않을 것을 보증했다. 이 의무를 파기한 것은 러시아뿐이지만, 미국도 영국도 그 의무가 러시아에 의해 지켜지도록 하기 위한 결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들은 경제적 힘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제재)이 푸틴이 군사적 힘을 투입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착각했다. 미국 정보국은 경제제재로 인해 발생할 비용이 푸틴에게 충분히 크지 않으리라는 것을 상당히 일찍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미국과 영국은 향후 믿을 만한 조약체결국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오직 나토와 러시아가 직접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감수할 때에만 막을 수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이 하나의 문제라면,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파괴를 막기보다는 오히려 가속화할 것인데, 다른 하나의 문제는 서구의 신뢰상실로 인한 국제질서의 붕괴이다. 아마도 후자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정치적으로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러시아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리고 심지어 전쟁발발 전에는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비로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그들의 핵잠수함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달아 승무원을 유지한 채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휘 아래 두었어야 했다. 그와 함께 우크라이나는 1994년 전의 상태로 다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면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공격하는 경우 불가피하게도 즉각 핵 반격을 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예고는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의 문제이기 때문에 믿을 만했을 것이다. 이렇게 젤렌스키는 푸틴에게 그가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비용을 청구했을 것이다. 특히 푸틴은 장군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도 예상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영웅적 낭만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위험을 내포한 행동을 할 때 냉철한 정신을 요구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큰 가능성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막았을 것이고 핵 억지의 신뢰성을 회복시켰을 것이다 전적으로 비영웅적이지만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다. 탈영웅적 사회들이 그런 치킨게임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도, 영국도 원하지 않았다. [가상의] 경우에 사안은 그저 전쟁을 막는 것이었을 테지만, 이제 비행금지구역을 선포하고 관철하는 것은 전쟁에 참가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번역: 강현선, 공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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