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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마켓과 영웅적 침착함 본문

논문 에세이 번역 책

크리스마스 마켓과 영웅적 침착함

공진성 2022. 1. 14. 10:45

201612월 독일 베를린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서베를린의 관광 명소인 일명 깨진종탑교회앞에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탈취된 트럭 한 대가 돌진한 것이다. 최소 12명이 죽고 48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사건이라고 하니 시민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크리스마스 마켓뿐만 아니라 연말 대목을 노리던 관광 산업도 함께 위축됐다. 불안 요소가 남아 있는 곳에 사람들이 방문을 꺼렸고 강해진 안전 조치가 사람들이 기대하던 연말 도심의 모습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라틴어 단어 테러(terror)는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또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테러는 폭력의 대상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폭력적 사태를 보거나 듣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했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두려움은 시각적청각적 매체를 통해 퍼져나간다. 오늘날처럼 매체가 발달하고 그 밀도가 높아진 환경에서는 더욱 빠르고 효과적으로 퍼져나간다. 공포를 퍼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도 우호적인 환경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체를 통한 전달을 강제로 차단할 수도 없는 것이 자유주의 사회의 딜레마이다.

얼마 뒤 베를린 시내에서는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함께 행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추모의 뜻과 함께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하는 시위였다. 테러 공격을 기획한 자들이 원하는 바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여전히 조금은 두렵지만 용기를 내서 광장으로 나와 스스로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테러 공격에 맞서 표출되는 시민들의 이런 덕성을 독일의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일찍이 영웅적 침착함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고대의 전사적 영웅성과는 다르지만 그런 영웅적 성향을 집단으로서는 이미 잃어버린 부유한 선진 사회의 시민들이 여전히 영웅적인 적들에 맞서 보유할 수 있는 덕성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19가 변이를 거듭하면서 계속 유행하고 있다. 올해로 끝났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상관없이 유행은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델타 변이라는 표현도 낯설었는데 오미크론 변이까지 등장했다. 또 어떤 변이가 나타날까. 정부의 방역 조치도 코로나19의 유행 상황에 따라 강해졌다가 다시 약해졌고, 또 다시 강해졌다. 방역 조치와 무관하게도 이미 사람들은 감염될까봐 두려워서 약속들을 취소했고, 연말 대목을 노리던 상인들은 예상되는 매출 감소에 걱정이 한 가득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모임과 이동이 늘어나면 감염의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바이러스 자체가 사람들을 통해 옮겨 다니며 증식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바이러스는 테러(공포)와 매우 유사하다.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실체화하기 어렵고, 또 사람들을 통해 퍼져나간다. 사람들이 좁은 공간 안에서 엄청나게 높은 밀도로 모여 긴밀하게 서로 연관을 맺으며 사는 방식이 바이러스와 테러의 확산에 모두 매우 이롭게 작용한다. 바이러스와 테러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고전적 전쟁의 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안과 밖의 구분,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어렵고, 그 구분에 근거해 세워진 전략이 통용되지 않는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것이 고전적 전쟁의 구호라면, 테러리즘이나 바이러스에 맞선 이 새로운 전쟁의 구호는 오히려 흩어져야 살고 뭉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흩어지면 또 경제가 죽는다. 그 난처한 선택의 상황을 상대에게 폭탄처럼 던지는 것이 테러리즘이고 또한 바이러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에서 이미 제시한 그 답은 바로 영웅적 침착함이다. 그것은 똘똘 뭉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보여주는 영웅성과도 다르지만,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지는 소심함과도 다르다. 그것은 침착하게 우리들 자신의 행동을 조절함으로써 공동체적 삶도 유지하고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적과도 싸우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적을 가짜로 실체화하여 화풀이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상황을 단칼에 정리해줄 단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그저 침착함과 조금의 용기를 지닌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가 곧 영웅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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