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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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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정치론>의 새로운 한국어 번역에 부쳐

공진성 2020. 6. 5. 19:32

스피노자는 1677221일 네덜란드 홀란트 주에 있는 도시 헤이그에서 44년 조금 넘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종이로 된 유언장은 없었지만, 폐병을 앓고 있던 스피노자가 하숙집 주인에게 자신이 죽으면 즉각 책상과 함께 그 속에 있는 편지와 원고들을 암스테르담에 있는 출판인에게 보내라고 미리 말해둔 덕분에 스피노자의 유고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스피노자의 친구들은 즉시 출간 작업에 착수했고, 그해 말 스피노자의 유고집이 출간되었다. 이미 완성은 했지만 탄압에 대한 우려 때문에 생전에 출간하지 못한 <윤리학>, 1670년에 이미 출간했지만 저자의 이름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신학정치론>, 그리고 미완성 초기작 <지성교정론>과 스피노자가 죽기 직전까지 작업한 <정치론>이 이로써 그 저자의 이름과 함께 세상에 공개되었다.

스피노자의 <정치론>1677년 스피노자가 세상을 떠난 해에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유고집(Opera Posthuma, 이하 OP)에 실려 처음 공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유고집(Nagelate Schriften, 이하 NS)에 실렸다. 스피노자의 수고(Manuscript, 이하 M)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네덜란드어 번역 텍스트는 처음 출간된 라틴어 유고집의 텍스트와 부분적으로 상이하다. 스피노자의 친필 수고가 사라지고 없는 상황에서 학자들은 OP에 의미가 불명확한 구절이 있을 때, M을 저본 삼아 번역했으리라 추정되는 NS를 통해 그 불명확한 의미를 확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OP에 없는 NS의 구절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 OPNS의 문장에 의미상의 차이가 있을 때 어느 것에 우위를 두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른바 원문자체가 조금씩 달라진다.

최초의 비평적 편집본은 1882/83년 네덜란드에서 나왔다. 그 후 1925년에 독일의 철학자 카를 겝하르트(Carl Gebhardt)가 하이델베르크 학술원의 위탁을 받아 스피노자의 전집을 새롭게 편집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학계의 표준적 비평본으로 간주되고 있다. 겝하르트는 OPNS의 차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텍스트를 확립했으며, 많은 현대어 번역본들이 이 텍스트를 저본으로 삼고 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의 책임 아래 스피노자 전집의 새로운 비평본이 출간되고 있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이 전집의 제5권으로 2005년에 출간되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프로이에티(Omero Proietti)가 라틴어 원문을 편집했고, 프랑스의 철학자 라몽(Charles Ramond)이 이를 프랑스어로 옮겼다.

<정치론>에 국한해 이야기하자면, 겝하르트의 비평본과 프로이에티의 비평본 사이에 두 개의 중요한 비평본이 더 있다. 1958년 영국에서 출간된 철학자 워넘(A. G. Wernham)의 비평본과 1994년 독일에서 출간된 철학자 바르투샤트(Wolfgang Bartuschat)의 비평본이다. 워넘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편집하여 자신의 영어 번역과 함께 묶어 냈고, 바르투샤트는 겝하르트의 텍스트를 OP와는 물론이고 NS, 그리고 워넘의 텍스트와도 비교해 새롭게 라틴어 텍스트를 편집한 뒤 자신의 독일어 번역과 함께 묶어 냈다. 결정적 차이는 없지만, 각자가 채택한 원문이 조금씩 다른 만큼 번역도 조금씩 다르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한국어로 처음 번역된 것은 1978년이다. 서문당에서 <국가론>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당시에는 세로쓰기 책이었다. 나중에 스피노자가 유행하면서 2001년에 가로쓰기 편집본으로 다시 나왔다. 동서문화사에서도 1994년에 이 책이 정치론이라는 제목으로 <윤리학>과 함께 묶여 출간되었다. 추영현이 번역했다고 되어 있지만, 김성근이 번역한 서문당의 <국가론>과 본문이 거의 똑같다. 둘 다 1940년에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하타나카 나오시(畠中尚志)의 일역본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에 프랑스 현대 철학이 한국에서 유행하면서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도 함께 증가했다. <윤리학>에 대한 관심이 기본이었지만,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도 컸다. 이런 관심 속에서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연이어 번역되어 나왔다. 2009년 신학자 김호경의 번역이, 2011년 정치학자 최형익의 번역이 나왔고, 2013(정치학자 황태연과 다른 사람인) 황태연의 번역이 나왔다. 아쉽게도 모두 중역이었다. 2017년 철학자 강영계가 처음으로 라틴어 원문을 한국어로 옮겼지만,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성과가 반영된 편집본이나 번역본을 전혀 참고하지 않아서, 기존의 중역본들과 내용상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에 도서출판 길이 라틴어-한국어 대역본으로 펴낸 <정치론>은 여러 면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옮긴이가 기존의 비평본들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검토해 밝히면서 자신의 해석에 따라 원문을 확정하고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상세한 주석도 달았다. ‘원전에 대한 비평적 이해와 그에 근거한 정확한 번역은 정치사상사 연구의 심화와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새로운 <정치론> 번역이 스피노자 연구는 물론이고 서양 정치사상사 연구에도 건강한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다른 저작에 비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표준적인 서양 정치사상사 서술에서도 스피노자는 빠져 있거나 주변적인 인물로 취급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재조명한 학자들도 대부분 <윤리학>의 내용에 근거해 연구자 자신의 스피노자적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었지, 스피노자 본인이 자신의 철학에 근거해 제시한 스피노자의정치이론에는 관심이 적었다. 지배 형태의 보존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면서 헌정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정치론> 속 스피노자의 개혁적 입장이 혁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시각에는 스피노자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전제하는 인간은 신에 대한 지성적 사랑을 추구하는 <윤리학> 속의 주인공과 다르다. 스피노자에게 정치학은 정서에 필연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그래서 비합리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평범한 인간들을 하나로 결합시켜 궁극적으로 함께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스피노자는 민주정의 존재론적 우선성과 근본성을 믿었지만, 결코 민주정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국가가 어떤 지배 형태를 취하더라도 안정적일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그 안에서 이성적인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모두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려고 다만 애썼다.

※ 이 글은 <대학지성 In&Out>에도 실렸다. 이 책의 의미에 대한 진태원 선생의 설명도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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