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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려워

‘촛불’이 과연 무엇을 명령할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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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과연 무엇을 명령할까?

공진성 2020. 2. 15. 11:01

철학자 스피노자는 한 편지에서 생각하는 돌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움직이는 돌이 있는데, 이 돌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돌은 자기가 계속 움직이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돌은 자기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어서 자기가 온전히 자유롭다고 믿으며, 오로지 자기가 원해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인간의 자유란 사실 인간이 자기의 욕구는 의식하지만 그 욕구를 결정하는 원인은 모르는 데에서 비롯하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남에게 인격을 부여한다. ‘인격의 핵심은 자율성이다.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키우는 동물에게도 그런 인격이 있다고 상상한다. 나를 향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보며 마치 강아지가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묘사하곤 한다. 심지어 우리는 신마저 인격화하여 신이 이렇게 저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묘사하곤 한다. 그러니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행동으로 표출된다고 여기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는 이런 가정에 근거한 인격적 정치(personal politics)’이다. 정치적 결과의 원인을 인간의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의지에서 찾는 것이다. 정치를 묘사하는 익숙한 방식이지만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정치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도 있다. 정치를 우리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허구적 자유 의지를 통해 설명하지 않고, 우리의 욕구를 결정하는 원인들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비인격적 정치(impersonal politics)’이다. 사람들은 이런 설명을 싫어한다. 자신이 다른 무엇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된다고 여기기보다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여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에 행위자에게 법적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우리가 쉽게 바깥의 여러 요인들에서 그 원인을 찾듯이 사실 사건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원인들의 결합이다. 이 인과관계의 전체를 스피노자는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신의 결정이고 신의 필연적이며 영원한 결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촛불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논의들이 넘쳐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 촛불에 참여한 개개인과 집단의 행위 능력을 긍정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한다. 그런 설명들은 그 전까지의,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정치적 노력들의 실패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설명할 수는 있다. 자신의 의지나 노력의 부족으로, 그리고 타인의 의지나 노력을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한 부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그런 생각으로 신을 의인화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때로는 그 노력이 부족해서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때로는 다른 마음을 품어서 벌도 받는 것처럼 묘사한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신을 의인화하던 습관은 근대 이후에 역사를 의인화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오늘날 우리들 개개인을 인격화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상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서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는 경향이 생겨난다. 가깝게는 자기 몸부터 멀게는 신까지, 우리는 대상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도 말하고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몸이 정신이 하는 말을 듣지 않듯이 신도 내 기도를 듣지는 않는다. 몸은 자기의 운동 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신도 자기의 영원히 필연적인 법칙을 따라 존재한다. 정치와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비인격적 존재마저 의인화하며 내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지만, 인격적 존재조차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그저 의지나 노력의 부족 탓은 아니다. 움직이는 것에는 움직이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그것 역시 다른 원인에 의한 것임은 생각하지 않고, 어떤 운동의 원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운동이 사회 변화의 핵심 원인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은 궁극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사실 운동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고, 우리의 의지 역시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강한 주장이다. 그러나 반대의 강한 주장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촛불 민심을 말하고 촛불 혁명을 주장한다. 민주주의를 바라는 우리의 의지가 결합하여 촛불로 표출되었고, 그 집단적 의지가 퇴행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했으며 앞으로도 한국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하는 바와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태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아니라, 복잡한 사태의 원인을 하나의 단일한 의지로 환원하는 것이고, 자신의 희망을 현실에 투영하는 것이다. 지난 몇 십년간 이루어진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이에 대해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의지와 욕구 자체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런 욕구의 변화가 최근에 우리가 목격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회적 변화와 그로 인한 욕구의 변화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에 촛불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고, 의도치 않은 결과와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의 정치적 변화에 직면하여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는 길을 신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또한 나중에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의 인격화와 신비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 이 글은 2017년 11월 광주YMCA의 청탁을 받아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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