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정치는 어려워

광주 지역 정치의 흐름과 변화를 읽다 본문

논문 에세이 번역 책

광주 지역 정치의 흐름과 변화를 읽다

공진성 2019. 11. 23. 16:38

[한국여성의정 광주아카데미 2019822일 강연 원고]

광주는 재생산의 위기에 처해 있다. 광주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먼저 인구상으로 재생산 위기이다. 출산이 줄어들면서 사회 전반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고, 사회의 변화에 대응한 개개인의 노력의 결과로서 지방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인구의 감소와 유출은 지역의 정치적 역량과 문화적 동질성을 감소시키고 있다. 전남에서의 유입과 서울로의 유출이 균형을 이루는 탓에 얼핏 인구가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높은 유동성 탓에 광주의 정치적 역량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 동질성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시민적 동질성과 양립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중심과 유효한 제도적 형식이 없기 때문에, 다양성이 사회의 파편화로 흐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육은 한 사회의 중심을 재생산하는 핵심 기제이다. 광주의 초중등 교육과 고등 교육의 현실은 어떠한가? ‘학력 광주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지역 내에서의 초중등 교육의 목표 자체가 중앙으로 더 많은 인재를 유출하는 것이다. 이제는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어쩌면 학생들 사이에서도 공적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교육은 제로섬게임의 상황에서 개인의 생존전략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장()이 되어버렸다. 지역에서 초중등 교육이 이렇게 기능할 때, 지역 사회의 중심이 과연 재생산될 수 있을까? 오늘날 광주 지역 사회의 중심은 비어 있는 채로, 연고 없이 중앙에 의해 이식된 엘리트, 연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지역을 떠나 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내려온 엘리트, 야심 없는 토착적 기능 엘리트, 노후한 토착 엘리트 등이 어수선하게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도 서울의 중심 없음과 광주의 중심 없음은 다르다. 서울의 중심 없음이 오히려 힘의 원천이라면, 광주의 중심 없음은 무력함의 원천이다. 서울의 중심 없음은 수도(首都)라는 제도의 산물이라면, 광주의 중심 없음은 엘리트의 재생산과 통합을 가능케 하는 제도가 없는 데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광주의 정치는, 또는 지방 일반의 정치는, 오늘날 그저 예산확보투쟁일 뿐이고 예산분배투쟁일 뿐이다. 지역의 유권자들도, 특히 투표장에 가는 유권자들, 선거의 결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민주당 지지자 일색인 것 같은 호남에서 새누리당 소속 의원도 당선되고, 국민의당 열풍도 부는 것이다. 정치인과 지역 유권자 모두 청와대와 국회만 바라보고 있다. 경제적 의존성이 결국 책임감 없는 정치를 낳는다. 책임이 우리들의 몫이 아닌 것이다. 일을 벌이는 것도, 일이 잘못 되었을 때 책임지는 것도 결국 중앙정부임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무책임하게 일을 벌인다. 중앙 정치에 예속된 지방 정치의 현실이 과연 정당공천제 폐지로 극복될 수 있을까?

선진산업사회 전체가 외연적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현 상황에서는 지구상의 거의 마지막 산업국가로 보이는 중국마저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여전히 성장률에 집착하는 한국은, 대부분의 다른 자본주의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공급과잉의 포화상태인 시장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물건을 팔아 외연적으로 성장해보려고 국내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세상은 온통 광고이고, 정부는 소득을 늘려서라도 소비를 진작하여 내수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한다. 언론은 광고지가 된 지 오래이고, 모든 매체가 광고를 통해 유지되며, 더 나아가 사실상 광고와 한 몸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소비주의가 성장의 한계에 대한 답일까? 계획적 진부화 전략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소비를 부추기는 일은 우리 자신의 생존 환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처치 곤란의 상태에 이른 선진국의 쓰레기 배출 문제는 그저 분리수거를 잘 하고 재활용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정치인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나? 정치와 정치인은 유권자/소비자의 욕구에 단순히 부응하여 더 많은 예산과 개발을 약속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자신의 당선과 재선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 100년 전에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로 먹고 사는 것’(das Leben von Politik)정치를 위해 사는 것’(das Leben für Politik)을 구분하며, 새로 출범한 공화국에서 정치가 점점 자신의 생계와 직결된 직업정치인(Berufspolitiker)의 일이 되어가는 현상과 그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정치를 위해 살고, 정치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Beruf, vocation)으로 여기며, 불가능한 현실에 맞서 좀처럼 뚫리지 않는 벽에 못을 박으려는 사람의 자세로 싸우는 정치인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광주와 대한민국의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것이 정치인 개개인의 덕성 부족 탓만은 아니지만,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오늘날 미래를 내다보고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 필요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선거 때마다 세대교체라는 구호가 나온다. 세대교체는 필연적이다. ‘3김시대의 청산을 아무리 외쳐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하자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절로 청산은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의 정치적 세대교체도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과연 언제일까? 내년 총선이 바로 그 때일까? 지난 총선에서의 국민의당 바람은 일회적인 복고 흐름일까? 그러나 지역 사회의 인구 구조가 세대교체를 가로막고 있다. 평균수명은 늘어나고 있지만 출산율은 줄어들고 있고, 청년층 인구유출은 지속되고 있으며, 청년층과 노년층의 투표율 차이는 크다. 노년층의 선택이 지역의 선거에서는 계속해서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언젠가는 386세대도 노년층이 되겠지만, 그러면 그때에는 장기간 투표를 결정하겠지만, 아직까지는, 특히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선거의 주된 관심이 예산 확보를 통한 지역의 개발인 경우에 여전히 다선의 노회한 정치인들이 노년층 유권자들은 물론이고 중장년층 유권자들의 선택도 받을 확률이 높다.

정당 지지의 분화도 필연적이다. 호남의 민주당 과다지지 현상은 어디까지나 민정당 후계 정당의 존속에 대한 반작용이었지, 순수한 이념적 지향의 결과나 선택은 아니다. 호남에도 다른 지역 못지않게 보수적 유권자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유권자들의 선택이 그동안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었다. 더욱이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오늘날 내부의 양극화로 인한 분배투쟁이 심각해질수록, 자기를 희생하도록 하는 대의명분이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는 한, 이기주의적 선택을 하는 유권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과 포퓰리즘 정당이 부상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그리고 탈당세력은 호남의 보수적(또는 진보적) 유권자를 두고 경쟁하다가 사회구조적제도적 조건 속에서 지속되거나 소멸할 것이다. 사회구조는 바꿀 수 없으므로 게임의 규칙을 둘러싼 다툼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혁명적 상상력과 열정이 사라져버렸다. 정치는 그저 주어진 규칙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는 일이 되었다. 정치적 싸움은 누가 규칙을 어겼는지를 폭로하는 일로 변했고(정치의 사법화), 각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규칙을 변경하려는 일로 변했다. 그리고 매체 환경의 변화가 더해지면서 정치는 이제 완전히 게임이자 유희/엔터테인먼트로 변해버렸다. 정치인은 오락 게임 속의 플레이어가 되었고, 유권자는 전문 플레이어들이 하는 게임을 구경하는 시청자가 되었다. 매체의 수가 늘어나고 매체를 통한 정보의 전달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들의 시간 호흡은 짧아졌으며 이제는 모두가 단기적 유명세에만 신경 쓰게 되었다. 실시간 뉴스와 검색어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렇게 빠르게 전달되었다가 다시 사라지고 잊히는 뉴스와 검색어에 등장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다. 정치인들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정치인에게는 과연 어떤 기회가 있을까? 광주는 여전히 보수적인 지역이다. 여성 정치인에 대한 편견도 강하지만, 인재유출을 학력광주의 증거라고 자랑하는 곳에서,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해온 역량을 갖춘 여성 엘리트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단일한 해법은 없다. 복합적인 과제가 서로 얽혀 있고, 장기적으로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단기적인 수평적 영입과 장기적인 수직적 양성이 필요하다.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지역 정치의 하부구조를 대체할 새로운 하부구조를 만들거나 기존의 하부구조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여성정치인들이 야심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야심이 공익에 부합하게 표출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또한 차근차근 만들어가야 한다. 군대 없는 장군은 없다. 마찬가지로 시민/유권자 없는 민주적 대표는 없다.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선택할 시민/유권자의 탄생 조건을 차근차근 만들고, 그 시민/유권자의 부패와 타락, 파괴의 조건을 없애고 방지해야 한다. 자기의 존재 근거이자 기반인 시민/유권자의 재생산 가능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최근 서구의 어느 클럽에서 발생한 사고에서도 드러났듯이 지역의 취약한 정책 심의 기능, 역량, 의지도 문제이다. 구의회와 시의회의 인적 구성이 우선 문제이다. 이해당사자가 정책 심의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대표가 되어 참여하는 것도 문제이고, 의회 안의 대표자들이 공적 마인드를 결여하고 있으며,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의회 바깥의 언론과 시민사회도 취약하다. 지역 시구 의회에 들어갈 인재의 풀이 보다 넓어지고 다양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적어 보인다. 왜 그럴까? 역량 있는 인재들을 지역 정치로 끌어들일 유인이 없다. 인구 86만의 프랑스 제2도시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한 정치 드라마 <마르세유>를 보면, 광주 지역 정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의회에서 시장을 선출하는 곳에서는 시장이 되기 위해 먼저 시의원이 되어야 한다. 시의원이 되려면 당연히 구의원부터 되어야 한다. 이런 곳에서는 의회가 정치의 중심이 된다. 언론도 의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광주의 사정은 어떤가? 의회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시장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동해야 한다. 국회의원 경력 없이 시장이 되기는 어렵다. 중앙정치적 연고가 있어야 예산도 더 잘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인재들의 야심이 흐르는 경로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지역 정치가 발전할 수 없다.

지역의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플랫폼이 필요하다. 지역의 내적인 다양성을 통일성 있게 표현할 공통의 플랫폼이 필요하다. 그것은 언론과 같은 매체이기도 하고, 의회와 같은 제도이기도 하다. 시장과 같은 인물이기도 하고, 연합한 시민사회 단체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앙에 종속된 거대 매체들과 왜소해진 지역의 낡은 매체들, 유명무실한 의회들, 그리고 이것들과 정치적으로 그리 생산적인 관계를 맺지도 않고 대안적 역할을 하지도 않는 시장, 그리고 근근이 간판을 유지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이 각자 알아서 자기 일들을 하고 있는 상황은 사회를 오히려 파편화하고 있다. 사회를 다양성 속에서 통합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신념 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 신념 체계가 근본적인 바탕이 될 때, 논쟁이 생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논쟁은 해결되지 않고 결국 물리적 싸움으로 확대된다. 공통의 신념 체계를 발견하고 유지보존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의례가 필요하다. 모든 국가는 그런 공동의 의례를 가지고 있다. 지방 자치가 발전한 곳일수록 지역 수준에서 준수되는 공동의 의례가 발전해 있다. 일종의 세속종교(civil religion)인 셈이다. 광주에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5.18이라는 공유된 정신과 그것을 기념하는 의례가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구체적 수준으로 내려오면 그 규제적 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알 수 있다. 5.18 정신이라는 것이 구두선에 그치고, 행위자들의 구체적 행위를 규제하는 힘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할 수 있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에서 여성 정치인이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프레임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외연적 성장의 시대에 해당하는, 그러나 큰 꿈을 포기한 후의 소극적인 선거 구호들, 즉 지역 발전과 더 많은 예산 확보를 대칭적으로 외쳐서는 우위를 확보할 수 없다. 비대칭화 전략을 택해야 한다. 다른 구호, 다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유권자의 욕구에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야합하는 길이 아니라, 유권자의 이성을 일깨워 자신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추구하도록 설득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이성의 기능을 해야 하듯이, 정치인은 유권자에 대해 이성의 기능을 해야 한다. 선거라는 캠페인의 공간에서 감성적 수단을 이용해 득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결코 목표 자체를 감정적으로/비합리적으로 설정하고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 미세먼지가 발생하고 지구 전체가 온난화하는 상황에서 내 자식만을 공기청정기와 냉방장치로 가득한 방에 가두어 키우는 것이 설령 부모의 자연스러운 대응일지는 몰라도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목표 설정은 아니다. 외적으로 더 클 수 없는 유전적 한계, 또는 종의 한계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성장을 고집하며 성장에 좋다는 온갖 식품을 사 먹이는 것이 올바른 자녀 사랑이 아니라, 자녀가 주어진 조건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이 부모의 올바른 자녀 사랑이듯이, 지역과 그곳에서 사는 시민들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표를 잃을 수 있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도 역설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위대한 정치인의 숙명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