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정치는 어려워

[번역]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제국> 출간 본문

논문 에세이 번역 책

[번역]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제국> 출간

공진성 2015. 4. 13. 09:12

2015년 4월 10일, 드디어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제국>이 출간되었습니다. 옮긴이의 글을 올려봅니다.

 

-------------------------

 

옮긴이의 말

 

 

일본의 식민 제국주의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제국은 여전히 민감하고 불편한 주제이다.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 한국인들의 반제국주의 의식은 1980년대를 지나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속에서 사회주의적으로 재해석되었고 일종의 과학적정당성마저 갖추었다. 과학적으로 해명된 이른바 피디PD반제국주의 의식은 전과학적이고 여전히 민족이라는 허구적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른바 엔엘NL반제국주의 의식을 비웃었지만, 저항과 해방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한 생각만 달랐을 뿐, 모두 반지배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또한 반제국주의적이었다. 여전히 한국의 많은, 특히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독서대중들은 지배가 나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제국, 더 나아가서는 국가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나쁜 지배와 나쁜 제국, 나쁜 국가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배와 제국, 국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비판하면서 그 비판을 논리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일에만 열중할 때, 결과적으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만드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정작 그것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이 책은 제국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정치적인 것을 조직하는 여러 형식들 가운데 하나이며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제국적 해결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는 새로운 전쟁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런 주장에는 역사가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반복해서 순환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책이 견지하고 있는 거시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은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새로운 문제들 속에서 과거의 문제들과의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문제 해결 방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해결 방식을 찾게 만든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주장은 문제의 새로움을 과장하면서 새로운 해결책을 창안하거나 새로운 문제를 기존의 국가중심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와 구분된다. 이 책은 제국에 관한 것이지만, ‘지배일반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옮긴이가 보기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베버의 지배사회학을 제국적 수준에서 다시 쓰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21세기 제국의 시대를 관찰하는 거시적인 눈과 함께, 지배와 권력 일반의 논리에 대한 이해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제국: 세계 지배의 논리이다. 책의 제목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를 두고 많이 고민했다. ‘제국이라는 제목의 책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제국은 물론이고 뒤에 붙은 세계 지배의 논리라는 부제목도 잠재적 독자에게 먼저 부정적 선입견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제국이성이라는 제목도 잠시 고려했었다. 지은이가 이 책을 통해 국가이성론을 제국이성론으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나 제국의 이성Raison’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한국의 지식 사회에는 낯설어 보여서 포기했다. 최종적으로 제목은 그대로 두되, 부제목에서 세계 지배평천하平天下로 옮기기로 했다. 보편적 질서에 대한 동아시아의 전통적 이해와 접목시켜 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편견을 누그러뜨리고 지배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어감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이 착상은 맹자Mencius를 영어로 옮긴 라우D. C. Lau 교수가 세계를 의미하는 한자어 천하天下제국Empire’으로 번역한 데에서 얻었다.

 

 

지은이에 대해서는 이미 3년 전에 출간한 새로운 전쟁한국어판의 <옮긴이의 말>에서 자세히 적었지만, 이 책을 통해 지은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내용을 여기에 다시 옮기고 새로운 사항을 추가하고자 한다. 이 책의 지은이 헤어프리트 뮌클러Herfried Münkler1951815일에 독일의 헤센 주에 있는 프리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1970년에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른 뮌클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대학교에 입학하여 독문학과 정치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마르크스와 루소 연구로 유명한 (작년에 타계한) 이링 페처Iring Fetscher 교수의 지도 아래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관한 논문을 써서 1981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에 뮌클러는 괴테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페처 교수와 지속적으로 학문적인 작업을 같이 했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피퍼스 출판사에서 두 사람이 함께 다섯 권으로 펴낸 피퍼스 정치사상 핸드북Pipers Handbuch der politischen Ideen(Pipers, 1985~1993)이다. 1987년에 유럽 근대 초기의 국가이성론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한 뮌클러는 1987년부터 퇴임한 페처 교수를 대신해 괴테대학교에서 정치사상사를 가르쳤고, 통일 후에 베를린에 있는 훔볼트대학교의 부름을 받아 1992년부터 지금까지 이 대학의 사회과학대에서 정치 이론과 사상사 강좌를 맡고 있다. 그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학술원의 창립 회원으로서 그곳에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의 새로운 편집과 출간을 또한 책임지고 있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뮌클러는 여러 편의 논문과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박사학위논문과 교수자격심사논문을 책으로 펴낸 마키아벨리Machiavelli(1982)국가의 이름으로Im Namen des Staates(1987), 그리고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1993)는 이미 근대정치사상사 분야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 세 권의 책은 뮌클러의 정치사상이 어떤 사상사적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정치적 상징과 신화에 관해 쓴 오디세우스와 카산드라Odysseus und Kassandra(1990)정치적 이미지, 은유의 정치Politische Bilder, Politik der Metaphern(1994)는 정치적 상징과 신화를 정치 이론과 사상사의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다시금 주목받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으며, 최근에 출간한 독일인과 그들의 신화Die Deutschen und ihre Mythen(2008)2009년에 라이프치히 출판상을 받았다. 뮌클러는 또한 일찍부터 전쟁과 군사적 폭력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1980년대 초반부터 줄곧 큰 전쟁작은 전쟁에 관한 여러 이론과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혁명적 운동들 속에서 개진된 폭력에 관한 다양한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정치적 질서를 해체하기도 하고 새롭게 형성하기도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서의 정치적 폭력의 역사적 형태들과 그 작동 논리를 일관되게 학문적으로 추적해온 뮌클러는 그동안의 학문적 관심과 지속적인 연구의 성과를 모아 2000년대에 전쟁에 관한 일련의 책들을 펴냈는데, 전쟁에 관하여Über den Krieg)(2002), 새로운 전쟁Die neuen Kriege(2002), 새로운 걸프전쟁Der neue Golfkrieg(2003), 전쟁의 변화Der Wandel des Krieges(2006),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에 맞춰 출간한 대전Der Große Krieg(2013)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 제국Imperien에서도 그 지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지만, 최근 10년 동안 뮌클러는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유럽연합과 그 중심 국가인 독일이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역할과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지에 매우 큰 지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을 가지고 각종 매체를 통해 발언하고 있으며, 그같은 발언의 배경을 또한 학문적으로 논증해 보이고 있다. 올바른 질서를 둘러싼 투쟁에 관한 책 중용Mitte und Maß(2010)과 유럽에서의 평화로운 질서 구성의 대표적 실패 사례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래를 위한 교훈을 도출하려는 책 대전大戰(2013)에 이어, 올해 초에 출간한, 유럽에서의 독일의 새로운 임무에 관한 책 중앙 권력Macht in der Mitte(2015)은 뮌클러의 이런 지적 지향을 보여준다.

 

 

뮌클러의 이 많은 책들 가운데 영어권에도 번역되어 소개된 두 권의 문제작 새로운 전쟁제국을 내가 한국어로 옮겨 소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2009년 봄이었다. 쉽게 번역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이 두 권의 책은 다루는 주제와 소재가 내게 낯설어서도 어려웠지만, 방대한 역사적이론적 배경지식을 전제로 삼는 뮌클러의 압축적인 서술 때문에도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비교적 안정적인 교수 신분을 얻은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각종 연구와 강의, 행정의 의무들이 나를 지속적으로 번역에 집중할 수 없게 했다. 결국 2011815일에 60회 생일을 맞는 뮌클러 교수에게 이 두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선물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2012년 초에 일단 새로운 전쟁을 먼저 출간했고,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제국을 출간하게 되었다. 장장 6년에 걸친 기획이었던 셈이다. 20117월에 이미 한국어판 서문을 써 보내준 뮌클러 교수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지은이 뮌클러는 옮긴이의 박사아버지Doktorvater’, 즉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이다.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이 두 권의 책이 출간됐지만 정작 그때는 내 공부에 바빠서 지도교수의 학문적 관심을 제대로 공유하지 못했다. 뒤늦게 숙제를 마친 셈인데, 지도교수의 학문적 세계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그리고 이제 내용적으로도 제자가 된 듯해서 기쁘다.

 

 

뮌클러는 이 책을 쓰면서 수많은 문헌들을 참고했다. 부러운 것은 동서고금의 문헌들을 거의 대부분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읽고 소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비롯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독일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뮌클러가 참고한 문헌들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책들은 최대한 찾아 직접 대조하고, 부분적으로 수정은 가했지만, 그 번역을 이 책의 번역에 반영했으며, 그 쪽수를 각주에서 밝혔다. 학문선진국에서 대부분의 저서와 역서가 외국 문헌들을 인용할 때 자국어 번역서를 이용하는 것에 비하면 독일어 서지사항을 밝히고 그저 한국어 번역본의 쪽수만을 병기했다는 점에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런 번역과 학문 풍토의 정착을 위해 현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독자들의 인정과 (저자와 역자를 포함한) 출판계의 분발을 바란다.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일일이 거명하지 않지만,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한다. 책세상 편집부의 인내와 독려에 특히 감사한다. 어려운 출판계의 상황 속에서도 시장의 논리와 타협하지 않고 좋은 책들을 최선의 상태로 펴내려고 노력하는 출판사에 이 책이 재정적으로 그저 해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0153월 무등산 기슭에서

옮긴이 공진성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