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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능성이 막힌 사회, 판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

공진성 2015. 4. 13. 08:39

가능성이 막힌 사회, 판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

 

얼마 전에 나는 칠순을 넘기신 어르신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분은 요즘 사람들이 힘들다, 어렵다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전쟁도 겪고 보릿고개도 겪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말로 오늘날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어려워도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이 열심히 살았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열심히 해보려고도 하지 않고, 세상을 그저 비관적으로만 여기며, 때로는 마치 정말 위기가 닥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씀하셨다. 현상적으로는 그리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과거와 사뭇 다른 것 같다고 나는 말씀드렸다.

 

 

실제로 과거와 현재를 외형적인 면에서 비교해 보면 여러 면에서 훨씬 더 살기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현재의 상황은 여러모로 암울하다. 영어를 잘 할 수 있는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지, 원하는 상대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는지, 번듯한 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는지, 여가를 즐기며 살 수 있는지, 안심하고 정년을 바라볼 수 있는지 여부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의 확실하다. 다른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커가면서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거의 무한한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면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에게는 그 가능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이 가능성이 심각하게 줄어들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차라리 파국을 맞이해 모든 것이 리셋’, 즉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싹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는 429일에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의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한 정동영 후보는 자신이 정치판을 바꿔보고 싶어서출마했노라고 밝혔다. ‘을 바꾼다는 표현은 일찍이 2004년 총선에서 노회찬 후보가 사용한 바 있다. 그는 정치판을 고기를 구워먹는 불판에 비유하며 이제 그 불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비유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광주의 서구을 지역구에 출마한 천정배 후보도 야권의 재구성을 말했다. 야권이 현재와 같은 판이어서는 호남정치의 개혁도, 정권교체도 모두 요원하다는 주장이다. 판을 바꾸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지금까지 사용하던 판으로는 도저히 달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야 한다. 기존의 구조 안에서 다른 가능성이 막혀 있을 때 사람들은 차라리 현재의 구조가 무너지기를 바라게 된다. 새로운 구조가 쉽게 들어설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비판은 그러므로 기존 구조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하다. 어찌 됐든 더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민주주의는 결과의 불확정성을 제도화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결과가 확정적이라면 이기는 사람에게는 좋겠지만, 질 게 뻔한 경기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리가 없고, 그러면 민주적 정당성 자체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경기들이 점점 더 확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정치판을 바꾸자는 노회찬과 정동영의 주장은 노동이 구조적으로 배제된 현재의 상황, 변화의 가능성이 제도적으로 막혀버린 상황을 지적한다. 야권을 재구성하자는 천정배의 주장은, 한국 정치 전반에서는 물론이고, 야권에서조차 호남이 구조적으로 배제된 상황을 지적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게임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것이 노동만은 아니고, 호남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경쟁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결과의 불확정성과 실질적인 선택의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인간의 결합은, 그것이 정당이건 경제공동체이건 간에, 심지어 국가이더라도, 언젠가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2015년 4월 13일자 <광주드림>에 실린 칼럼입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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