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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한다(7) 아렌트와 '생각'하는 인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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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한다(7) 아렌트와 '생각'하는 인간

공진성 2015. 1. 5. 20:53

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한다(7) 아렌트와 생각하는 인간

 

팔자 좋게도 1년이 넘게 유럽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광주에 있습니다. 글을 쓸 때에만 잠시 마음으로 유럽에 가 있을 뿐입니다. 유럽에서 머물렀던 때를 떠올리며, 유럽과 광주를 교차시키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얘깃거리가 떨어져 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져서 걱정입니다. 조만간 다시 유럽에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어느 도시에 가면 좋을까요? 우리는 보통 유럽에 간다고 말합니다. 제한된 수의 나라와 도시를 방문하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아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유럽의 국경 개념이 우리와 같지 않아서 이동이 편하고, 또 도시의 역사가 국가의 역사보다 훨씬 더 길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럽 전체가 도시와 도시들의 연결망이라는 느낌이 더 뚜렷하게 듭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과 정체성도 이처럼 여러 도시들을 연결한 짙거나 흐린 선들로써 묘사될 수 있지 않을까요?

 

2013년 여름에 저는 친구가 살고 있는 도시 하노버를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유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아렌트의 흔적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렌트는 1906년에 하노버 외곽에 있는 린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느 흐린 월요일 아침, 그곳을 찾았습니다. 그가 태어나 3년쯤 살았던 집 건물의 1층에는 약국이 들어서 있었고, 그 덕분에 멀리서도 건물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약국 간판 밑에는 아렌트의 출생 사실을 알리는 기념 편액이 붙어 있었습니다. 정작 아렌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철학자 칸트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입니다. 지금은 칼리닌그라드라고 불리는 이 러시아 도시는 당시 독일에 속해 있었습니다. 아렌트는 부모의 고향인 이곳에서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또한 생각하는인간으로서 자라났습니다.

 

 

 

아렌트는 중학생 나이에 이미 칸트와 야스퍼스,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또래(동시대인)에 비해 조숙하면 시대와의 불화를 겪게 마련이죠. 아렌트는 학교에서 교사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아렌트는 베를린으로 갔고 그곳의 신학교에서 청강생으로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르고 1924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아렌트는 35세의 젊은, 그러나 세상의 눈에는 그저 아렌트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이미 결혼까지 한, 철학자 하이데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또 한 번 시대와의 불화를 겪습니다. 아렌트는 1926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소속을 옮기고 이곳에서 1928년에 철학자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박물관에는 이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학생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마친, 그러나 아직 20대 초반의 나이인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출판했고, 한 세기를 먼저 살다간 유대계 독일인 여성 라헬 파른하겐의 전기를 썼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종족적 정체성과, 독일인 또는 유럽인이라고 하는 문화적 정체성 사이에서 많은 실존적 고민을 하며 활동한 시기였습니다. 아렌트는 1930년대 초에 이미 나치즘의 불길한 기운을 느꼈고 반나치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지식인들은 사태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새로운 지도자를 칭송하는 유대계 지식인조차 있었습니다. 1933년에 아렌트는 비밀국가경찰, 일명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8일간 구류를 삽니다. 다시금 시대와의 불화를 겪게 된 아렌트는 파리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시오니스트)과 함께 일합니다. 1937년에 독일 국적을 상실한 아렌트는 무국적자 신분으로 계속 파리에 머무르다가 1940년에 프랑스에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한 달이 넘게 수용소에 갇혀 있게 됩니다. 운 좋게 수용소를 탈출한 아렌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뉴욕으로 도망칩니다. 10년이 지난 1951년에 비로소 아렌트는 국적이라는 것을 다시 가지게 되고, 이때 출간한 책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서구 사회에서 일약 스타가 됩니다.

 

 

뉴욕에서 평온한 삶을 살던 아렌트는 10여년이 지난 후에 또 다시 시대와의 불화를 겪게 됩니다. 1960년에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숨어 살던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정보부에 의해 체포됩니다. 도대체 어느 법에 근거해 이 사람을 체포하고 또 처벌할 수 있는지를 두고 서구의 지식인들, 특히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집니다.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아이히만의 재판을 아렌트는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에 가서 취재하여 보고하겠다고 나섭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3년에 출간된 <이스라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입니다. 2013년에 개봉된 영화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의 출간을 전후로 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재판을 취재하면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인간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생각하는 능력을 잃었음을 발견합니다. 그가 악한 행동을 한 것이 그가 악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생각은 단순한 계산적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대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과 불편한 긴장 관계를 맺게 하는 반성적 능력입니다. 그것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 정신의 고유한 성질이라고 아렌트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하는 존재라면 시대와, 조직과 불화를 겪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반대로, 시대와, 조직과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고 불화도 겪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렌트가 의미하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사람이었고, 그러므로 또한 악한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렌트의 설명은 우리를 이중적으로 불편하게 합니다. 한 편으로는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우리들 역시 그런 나쁜 짓을 할 수 있음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아렌트가 태어난 곳을 둘러본 후에 저는 하노버의 시립도서관 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한나-아렌트-이 있습니다. 도서관 3층에 있는 작은 방 입구에 평범하게 방 번호와 한나-아렌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방 안 벽에는 아렌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설명들이 적혀 있었고, 책꽂이에는 아렌트가 쓴 책의 독일어 번역본들이, 그리고 유리 상자 안에는 그가 직접 사용하던 자신의 책 초판본과 가방, 담배 케이스, 사진, 각종 상과 메달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학교 중앙도서관에도, 예를 들면, ‘박현채 방이나 염수균 방과 같은 것을 꾸며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많은 대학들에 사람 이름을 딴 건물과 방이 들어서는데, 대부분 그 이름의 주인공은 건물과 방을 만드는 데에 물질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입니다. 물질적 가치만이 진정한 가치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 대학이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그럼으로써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을 길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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