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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한다(5) 도시와 사람의 흔적

공진성 2014. 11. 5. 08:43

유럽에서 광주를 생각한다(5) 도시와 사람의 흔적

 

여행의 동기는 사람마다 다를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해진미를 찾아 여행을 하겠지만, 저에게 음식은 그다지 여행의 동기가 되지 못합니다.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건 이미 죽은 사람이건 간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는 일은 언제나 저를 설레게 합니다. 물론 거기에 음식이 함께하면 더 좋겠죠. 그러나 음식만을 위해 어느 곳을 찾아간다는 것은 아직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베를린의 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철학자 헤겔이 묻혀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공원묘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는 유명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그의 부인 헬레네 바이겔의 묘도 있습니다. 부부가 마지막 생을 보낸 집이 그 공원묘지 옆에 있는데, 1978년에 사람들이 그 집을 박물관으로 꾸미고 지하창고를 레스토랑으로 만들었습니다.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부부의 입맛에 아마도 베를린 음식이 잘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브레히트의 아내가 틈틈이 남부지방의 음식을 나름의 방식으로 개발하여 남편과 동료들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그녀가 남긴 조리법을 따라 남쪽 지방 음식을 만드는 브레히트하우스 지하의 이 창고레스토랑은 공원묘지를 방문하고 난 후에 꼭 한번 들러볼 만한 곳입니다. 사람의 흔적에 더해 사연 가득한 음식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인 셈이죠.

 

 

 

 

 

도시는,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사람의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역사가 긴 도시라면 더욱 그럴 테지요.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그 도시의 역사 속에 스며들어 있을 것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 역사적 과정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몇몇 인물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2013년 여름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저는 이 도시의 역사와 관련한 몇 사람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얼마 전에 마침 루소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한 논문도 쓴 터여서 먼저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루소는 젊은 시절과 말년의 몇 년을 파리에서 보냈습니다. 파리는 중세 이래로 마치 유럽의 수도와도 같은 곳이었으므로 야심 있는 청년 루소와 유럽의 영향력 있는 지성인 루소가 그곳에 잠시나마 머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집이나 그 밖의 흔적은 파리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흔적은 더 크게 남아 있었습니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거대한 석조건축물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름은 빵떼옹, 즉 만신전입니다. 그 언덕길은 건축가의 이름을 딴 수플로가입니다. 이 건물은 애초에 기독교 예배당으로 지어졌지만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공화국의 건설에 기여한 위대한 인물들의 유해를 안치하는 곳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당연하게도 왕정이 복구되었을 때, 공화국의 영웅들은 쫓겨나고 기독교 성인들과 군주들의 유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 건물의 지하에 루소를 비롯하여 프랑스 공화국 역사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묻혀 있다고 표현하기가 어색한 것은 유럽의 예배당 지하에는 힘 있는 인물들의 관이 땅 밑에 묻혀 있지 않고 그냥 땅 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루소의 무덤(?)은 이곳 지하묘역에 볼테르의 무덤과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는 했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적도 없는 루소를 프랑스가 이처럼 자국의 영웅으로 숭배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무척 신기하고, 오늘날 번역을 통해 각국 지성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아예 언어적 장벽도 없이 음악이나 미술을 통해 문화적 세례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출신과 국적에 연연해하는 우리의 모습이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습니다.

 

 

 

 

학창시절에 저는 중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여전한 미련과 함께 동양적인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중국어도 배웠고 중국으로의 유학도 준비했습니다. 그 무렵에 제가 좋아했던 사람이 바로 저우언라이입니다. 외무부 장관을 지낸 그의 경력 때문이었는지 저는 왠지 그를 마오쩌동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당시에 읽은 그의 전기에는 그가 파리에서 3년가량 노동자로서 일하면서 유학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 젊은 청년 저우언라이는 프랑스로 일을 하러 떠납니다. ‘근공검학(勤工儉學)’의 이념 아래 그는 열심히 일하는 틈틈이 공부도 했고, 또 유럽의 다른 도시들을 오가며 공산주의 운동에도 힘썼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13구의 고드프루아가 17번지에는 그가 당시에 머물렀던 호텔이 아직 그대로 서있고, 호텔 담장에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당시에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에서 마찬가지로 노동자로서 일하던 덩샤오핑이 파리에 올라올 때면 늘 이 집에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머물렀다고 합니다. <파리의 장소들>에서 이런 일화를 전한 후에 정수복 선생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는지 두 사람은 훗날 세계정세의 움직임을 꿰뚫어보면서 중국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저우언라이는 1970년대 초 외무부 장관 시절 미국과 핑퐁 외교를 벌여 중미 외교관계를 열었으며,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후 중국 시장을 개방해서 오늘의 중국 경제가 가능하게 물꼬를 텄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살던 집 앞에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덩샤오핑을 닮은 작은 키의 중국 남자가 나를 힐끗 보고 지나간다.” 

 

 

광주에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외국인들을 보며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노동자들 가운데, 미래의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가 혹시 숨어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들이 그 정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보이지 않게 흔적은 남을 테고, 그 흔적들이 이 도시의 색깔을 다르게 만들어갈 테니까요. 파리 13구의 이탈리아 광장에서 슈아시가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수많은 아시아 식당들을 보면서 요즘 광주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외국음식전문점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광주에 정착하는 외국인의 수가 늘어나고 그 출신 국가가 다양해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에디뜨 삐아프가 태어난 거리

 

파리와 같은 대도시는 곳곳에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는 우연찮게 작곡가 에릭 사티가 살았던 집을 발견했고, 벨르빌 역에서 뷔트쇼몽 공원으로 가는 길에서는 가수 에디뜨 삐아프가 태어나서 버려진 곳을 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태어나서 길거리에 버려졌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을 지나가다가도 우연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거리 곳곳에 붙어 있는 기념편액 덕분입니다. 제가 한 달간 머물렀던 줭띠이 어느 길모퉁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액이 붙어 있었습니다. “1942211일에 이곳에서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죽은 누구누구,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 돌아와 1957년에 죽은 누구, 우리의 전우들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 주위의 작은 영웅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리고 굳이 적에 대한 증오를 새기지 않으면서 전쟁에서 스러진 전우들을 기억하는 것이 저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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